주간동아 619

2008.01.15

배역마다 팔색조 변신 “전 캐릭터가 없대요”

  • 입력2008-01-09 18: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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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역마다 팔색조 변신 “전 캐릭터가 없대요”
    문소리는 객관적으로 예쁜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화려한 외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 배우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퀴즈 하나. 문소리는 본명일까? 본명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너무 못생긴 아이를 보고 산부인과에 아이가 바뀐 게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세 살 이후 쌍꺼풀이 생기고 살이 빠지면서 지금 같은 모습이 됐다. 어릴 때 몸이 너무 작아서 아버지 성인 문씨와 어머니 성인 이씨 집안에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문과 이 사이에 ‘작을 소’자를 넣어 문소리라고 이름지었다.”

    생활고 겪는 핸드볼 선수의 삶 열연

    하지만 문소리는 지금 거목으로 성장했다. 문소리는 맨 처음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년)에서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의 첫사랑 윤순임 역으로 출연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위해 차출되는 김영호를 면회 갔다 만나지 못한 후,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건 때문에 차갑게 변해버린 남자친구에게 상처 입은 순임은 지병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첫사랑을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순임의 남편 손에 이끌려 병실을 찾은 김영호를 순임은 바라볼 수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는 김영호가 사라진 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당시만 해도 문소리는 미지의 배우였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몇 차례 연극무대에 선 것이 전부였던 그는 ‘박하사탕’으로 갑자기 한국 영화에 나타나 때묻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오아시스’(2002년)에서 뇌성마비 지체장애 1급의 한공주 역을 맡아 온몸이 뒤틀린 채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로 문소리는 베니스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하지만 문소리가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4년)에 캐스팅됐을 때 충무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창동 감독 없이 그가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옆집 고등학생(봉태규 분)을 유혹하는, 변호사 영작(황정민 분)의 아내 은호정 역을 맡은 문소리는 올누드 연기까지 펼친 결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문소리는 ‘효자동 이발사’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사랑해 말순씨’ ‘가족의 탄생’ 등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며 데뷔 10년도 안 돼 한국 영화의 중요한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배역마다 팔색조 변신 “전 캐릭터가 없대요”
    “문소리는 천의 얼굴을 가진 동시에 얼굴이 없는 배우다.”

    ‘가족의 탄생’에 함께 출연한 배우 고두심의 이 말은 문소리 연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특정 캐릭터로 제한돼 있지 않다. 그는 변신의 귀재다. 어떤 역이든 자신을 벗어던지고 들어가 캐릭터를 완벽히 육화해낸다.

    “(출연료) 입금되면 다 해요.” 한때 인구에 회자된 문소리의 이 발언은 어떻게 짧은 시간에 들쭉날쭉한 체중 변화를 비롯해 극단적인 연기 변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입금된다고 누구나 쉽게 변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발언은 그가 얼마나 자기 일에 철저히 임하는지를 알려준다.

    “살아오면서 험난하고 큰 산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산을 넘으면 다음에 어떤 산을 만나든 넘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찍으면서 그런 생각이 자만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함께 울면서 같이할 수 있는 친구와 동료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넘은 산은 어느 산보다 험난했지만, 산행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04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여자대표 핸드볼팀을 소재로 한 임순례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한국 여자 핸드볼팀은 덴마크와의 결승전에서 두 차례 연장전까지 동점을 기록하다 마지막 승부던지기에 져서 은메달을 땄다. 심판의 오심과 편파 판정에도 굴하지 않고 세계 최강의 장신 군단 덴마크를 상대로 투혼을 불사른 여자 핸드볼팀은 전 국민을 감동시켰다.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이라는 수식어도 따랐다. 하지만 그런 환호와 격려만으로 영화적 긴장감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영화다.

    임순례 감독은 핸드볼팀의 주역이던 선수들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추며 스포츠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흔한 스포츠 영화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때문에 이야기는 핸드볼팀의 아테네 결승전을 향해 선형적 구성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첫 부분은 소속팀 해체 후 마트에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국가대표 12년 경력의 미숙(문소리 분)의 삶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된다.

    미숙은 남편(박원상 분)이 사업에 망해 도망자 신세가 된 후 여섯 살짜리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선수 시절 미숙의 라이벌이던 혜경(김정은 분)은 일본 프로팀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 국가대표팀 감독대행을 맡아 귀국한다. 노장 선수들의 은퇴 후 가장 약체가 된 팀의 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예전의 핵심 멤버를 불러들여야겠다고 판단한 혜경은 미숙을 비롯해 한 번도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채 은퇴한 정란(김지영 분) 등을 국가대표로 발탁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을 향해 달려가는 수직적 구조 아래 혜경과 한때 그의 동료였던 노장 선수들 그리고 후배 선수들 간의 갈등과 불화를 전반부에 펼쳐 보인다. 팀 내 불화로 감독대행직에서 해고된 혜경과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선수 출신 안승필(엄태웅 분), 노장 선수들 사이의 갈등은 후반부의 핵심이다. 수평적으로는 남편의 빚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미숙이 우승 사례금을 미리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돈이 혜경의 사비임을 알고 팀을 이탈하는 것이나, 혜경과 연인 사이였던 안승필과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면서 기싸움을 펼치는 내용이 수직적 구조 사이로 전개되며 수평적 균형을 이룬다.

    핸드볼 실력 쌓기 위해 3개월간 합숙훈련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이 궁금하다면 당시 TV 방송을 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결승전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 데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임순례 감독은 잘 알고 있다. 긴박감 넘치는 경기 장면 너머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적 드라마를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또 다른 승부처다. 그러기 위해 감독은 도입부에서부터 선수들 개개인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빚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는 미숙, 기량이 있지만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고 은퇴한 후 남편과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정란, 감독대행에서 해고된 뒤 옛 연인이 감독으로 부임한 팀에서 다시 선수로 뛰는 혜경, 골키퍼 수희(조은지 분) 등의 캐릭터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기 때문에 후반부의 땀냄새 나는 인간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혼당하기 싫어서 펑펑 울며 술주정한 적이 있다.”

    장준환 감독과 결혼한 지 갓 1년 된 문소리는 핸드볼 선수가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합숙훈련을 해야 했는데 같이 출연한 배우 김지영이 그러다간 이혼당할지 모른다고 경고했단다. 합숙훈련을 하면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쌓였던 문소리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신 뒤 집에 들어가 장 감독에게 이혼당하기 싫다며 울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코치님(그는 장준환 감독을 코치님이라고 부른다)이 나를 보더니 ‘나 이혼 안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했다.”

    모든 캐릭터의 내면에 다다라 연기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문소리. 소리 없이 그는 한국 여배우의 대들보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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