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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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인 줄 알면서도 TV 껴안고 사는 까닭은

  • 이기호 90402201@hanmail.net

    입력2008-12-08 1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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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상자인 줄 알면서도 TV 껴안고 사는 까닭은
    얼마 전 아내 앞에서 굳은 다짐을 하나 해야만 했다. 출마를 하겠다거나,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겠다거나, 이제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돼보겠다거나 그런 커다란 다짐은 아니었고, 아이 앞에서만큼은 절대 TV를 켜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이었다. 거기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의 10년 넘게 유지해온 내 아침 생활 패턴이라는 것이 그랬다. 눈을 뜨자마자 신문을 들고 TV 뉴스를 보는 것. 신문에 난 사건사고를 다시 한 번 영상으로 확인하는 것. 밥을 먹으면서도, 양치질을 하면서도,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래서 종종 옷을 거꾸로 입거나 양말을 뒤집어 신었다(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 또한 그랬다. 우리 형도 그랬다). 내가 잠들어 있던 간밤에 지진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뉴욕 증시가 폭락하진 않았는지(여태껏 주식 한 주 사본 적 없는 위인이!), 누군가 행여 자살하진 않았는지 걱정되고 궁금해서 버릇처럼 리모컨을 들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모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한데 그 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은 다름 아닌 아이 때문이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가,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리모컨 버튼부터 눌러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거기까지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문제는 TV 화면을 바라보는 아이의 자세였다. 아이는 ‘멍 때린다’는 속된 표현이 적확할 정도로 TV 화면을 보며 ‘멍 때렸’다. 우유를 내밀어도, 좋아하는 바나나를 건네줘도 아이는 거들떠보지 않고 오롯이 TV만 보았다. 그러니 아내의 곱지 않은 시선이 내게 쏠릴 수밖에. 그게 다 당신 보고 배운 거 아니겠냐고, 아이한테 TV가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알기나 하냐고 아내는 목청을 높였다. 그러니 뭐, 별수 있나. 세계 평화가 걱정스러워도 다짐을 할 수밖에. 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 특히 그랬다. 아이와 좀 놀아줘야지 매번 결심을 하지만,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아이와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목말을 태우는 것도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러니 자꾸 리모컨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제발이지 아이가 나 말고 다른 곳 좀 바라봤으면, 나는 몇 번이고 리모컨을 들었다 놓고, 또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주말만큼은 내가 아이를 돌보기로 약속했으므로 아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한창 진행 중인 프로축구 플레이오프 경기들이 궁금했고, ‘무한도전’이 궁금했고, CSI 에피소드들이 궁금했다. 10년 넘게 쌓인 관성이니 마치 무슨 중독자처럼 저절로 손이 가고 무의식중에 발이 먼저 나갔던 것이다(발가락으로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경기가 있다면 한번 나가봐야지, 예전엔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난 주말엔 아이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집에 있으면 유혹을 견디기 어려우니 차라리 나가자, 아이를 놀이터에 풀어놓고 그 옆에서 담배나 피우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아이를 좀 피곤하게 만들어서 일찍 재우고 말겠다는 의지도 한몫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어느덧 계절은 쌀쌀하고 시린 계절로 변해 있었다. 단풍은 모두 떨어졌고, 잔디는 진갈색으로 돌아누워 버렸으며, 새들은 높게 높게 날아다녔다. 아이는 콧물을 흘리면서도 그 모든 것을 한눈에 다 담으려는 듯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그 아이를 쫓아다니면서 나는 이전까지 몰랐던 것들, 그러니까 아이의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과 아이가 노란색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다는 것, 아이가 남자아이들보다 여자아이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아내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설명했다. 역시 아빠를 닮았군!)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가끔 미끄럼틀에 매달리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이를 품속에 꼬옥 안아주었다. 그 순간은 뭐랄까, 내가 살아 있구나, 살아서 숨 쉬고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TV 뉴스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죽었다가 깨어나 또 부활해도 가르쳐줄 수 없는 가르침들이었다.

    TV의 유해성에 대한 말들은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어떤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서 멀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모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실체 없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모두 TV를 켜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 이유 없는 두려움이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 두려움일 뿐이다. 왜 우리는 항상 어떤 매개물의 도움으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욕망하게 되는 것일까? 매개물(혹은 장애물이라고 해도 좋겠다)이 사라진 뒤에도 정말 그것들을 사랑하고 욕망할 수 있게 될까? 넘어졌다가 일어난 아이를 가슴에 안고 계속 그 생각들을 해보았다. 아이의 심장은 내 심장 반대편에서 정확히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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