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6

2008.10.14

가을날

  • 입력2008-10-08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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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날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가을날
    주여, 이제 때가 됐나이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 채우도록 명령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남녘의 날들을 주시어,

    무르익기를 재촉하시고 무거워지는 포도알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나중에도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 살 것이며,

    깨어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흩날릴 때면 가로수 사이를

    불안하게 배회할 것입니다.




    *릴케가 생산한 대부분의 시들은 감상이 지나쳐, 소녀티를 벗은 뒤 나는 그의 시를 멀리했었다. 그러나 ‘가을날’만은 예외다. 여러 번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무거워지는 포도알’처럼 멋지게 표현할 시인이 또 있을까. 땡볕에 익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포도다워지는 둥근 열매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가을날
    바람 부는 들판에서 시작되어 포도밭을 지나 이윽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상의 전개도 입체적이다. 제3연의 시간적 배경은 대낮과 저녁을 지나 어느덧 밤. 홀로 타오르는 촛불처럼 고독한 인간은 집이 없다.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다. 앞의 두 연에 비하면 상투적인 결말이지만, 가을날에 어울리는 밤이다.

    [출전] Rainer Maria Rilke, Sa··mtliche Werke 1, Insel Verlag,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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