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5

2007.03.06

무식용감한 ‘저작권 불감증’

  •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7-03-05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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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식용감한 ‘저작권 불감증’
    연초부터 국내 출판계에 저작권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이레출판사 펴냄) 한국어판 표지그림이 캐나다 사진작가 그레고리 콜버트의 사진을 그대로 베껴 무단 도용 혐의로 형사고소를 당한 데 이어, 류시화 씨가 엮은 베스트셀러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오래된미래 펴냄)의 표지그림이 또다시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미국 뉴욕에서 출간된 시집 ‘장미’의 표지그림은 붉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구부러진 지팡이의 손잡이 끝에 마치 가로등처럼 반짝이는 눈을 그려 넣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의 표지그림은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그린 것만 다를 뿐, 누가 봐도 표절임이 명백하다. 인도네시아계 시인 리영리의 ‘장미’는 2000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나무생각 펴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됐으나 당시 시인의 얼굴이 들어간 표지를 채택해 원작의 표지그림은 잊혀졌다가 엉뚱한 책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원작을 입수한 대학 교수의 제보로 밝혀졌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 한국 출판계의 무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진작가가 사진 사용을 거절하자 삽화가에게 똑같이 그리게 해서 표지에 넣은 것은 ‘걸 테면 걸어봐라’식 배짱이다. 또 이미 국내에 번역돼 나온 책의 원작 표지그림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설마 누가 알겠어?’라고 생각했다면 안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올해 초 유대인 사회와 문화를 연구해온 현용수 박사(‘유대인 아버지의 4차원 영재교육’ ‘자녀들아, 돈은 이렇게 벌고 이렇게 써라’의 저자)와 ‘탈무드’ 출판을 의논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국내에는 탈무드 관련 책이 100권 가까이 있는데 표지를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 또는 토케이어(실제 발음은 토카이어) 지음으로 되어 있거나 저자 없이 역자 이름만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한국인 저자를 앞세웠다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구전돼온 유대인의 지혜를 모은 책이 무슨 저작권이 있으랴 생각하면 오판이다. 랍비 토카이어와 솔로몬은 이방인들, 특히 동양인들에게 유대의 사상과 지혜를 소개하기 위해 방대한 ‘탈무드’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책을 썼기 때문에 제2의 창작이라 할 만큼 엮은이의 시각이 많이 반영돼 있다. 특히 토카이어는 20여 권의 ‘탈무드’를 펴냈는데 모두 일본어판으로만 출간됐고, 국내에 소개된 ‘탈무드’의 상당수가 이 일어판을 짜깁기한 것이다. 또 두 저자 모두 한국어 출판을 허락한 바 없으니 적어도 솔로몬이나 토카이어 지음으로 나온 책은 모두 저작권을 위반한 셈이다.



    현용수 박사는 토카이어에게서 정식으로 한국어 독점 판권을 위임받고 꼼꼼한 각주를 단 새로운 탈무드를 준비하고 있으나 독자들이 그 진가를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표지그림 표절 시비에 휘말렸어도 ‘인생수업’은 12주째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대리번역으로 말 많은 ‘마시멜로 이야기’도 여전히 잘 팔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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