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3

2010.02.09

마음속에 남은 풍경으로 초대

민병헌 ‘SL080 BHM’

  • 김지은 MBC 아나운서·‘예술가의 방’ 저자 artattack1@hanmail.net

    입력2010-02-04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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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속에 남은 풍경으로 초대

    민병헌 ‘SL080 BHM’, 2005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듯한 생각에 다시 한 번 천천히 표면을 눈으로 더듬습니다. 그러다 보면 날리는 눈발 너머로 보이는 가느다란 수직선들이 전봇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전봇대가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면 나무들과 한 채의 집이 어렴풋이 보이죠. 사진작가 민병헌(55)의 ‘Snowland’ 연작 중 ‘SL080 BHM’(2005)을 처음 보면, 일단 사진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색 때문에 눈이 부십니다. 작가는 눈이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의 풍경 자체가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이동시킵니다. 사진의 피사체는 전봇대나 나무가 아니라,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바라볼 때 눈을 가늘게 뜨게 만들었던 ‘눈부심’이 아닐는지요.

    제목에서조차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 민병헌의 사진은 특정 시공간이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보편적인 풍경을 재현하는 듯합니다. 작가 역시 한 인터뷰에서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찍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밝혔는데요. 사진이 발명된 이후 찍을 만한 대상은 모두 찍혔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중요한 건 피사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찍느냐, 즉 풍경을 포착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눈’이라는 거죠.

    그는 명암 대비가 뚜렷하지 않는 날만을 골라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뤄온 소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먼지 날리는 흙길을 찍은 ‘별것 아닌 풍경’, 비닐하우스 표면에 아슬아슬 자란 이름 모를 풀을 담은 ‘잡초’, 시야를 자욱이 가린 ‘안개’, 보는 사람의 시각과 정서를 무한대로 확장한 ‘하늘’ 시리즈 등 하찮은 소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직하게 찍습니다. 당시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진가들은 콘트라스트가 강한 ‘메이킹 포토’(만든 사진)를 유행시켰습니다. 이내 관객들은 자극적인 사진에 익숙해져갔고요. 하지만 민병헌은 밋밋하기 짝이 없는 사진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관객의 눈과 마음입니다.

    디지털 사진이 대세인 요즘에도 그는 여전히 필름 사진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조수 없이 인화에서 현상까지 자신이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화지나 현상액을 구할 수가 없어 매우 힘들지만, 그의 꿈은 아날로그 흑백사진의 한계에 평생 도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깜깜한 암실에서 혼자 있는 느낌을 가질 때,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의 말처럼, 가시적 풍경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원형적 풍경을 아무런 인위적 손질 없이 포착해내는 솜씨 덕에 우리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겨울 풍경을 감상하게 됩니다.

    민병헌의 작품은 해외와 국내 모두에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왜 좋은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서양 회화나 사진에서는 자연을 완벽히 재현하면 ‘마스터했다’며 좋은 평가를 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스터’의 눈을 내려놓은 후 원형적 자연을 담아낸 그의 작품이 해석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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