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9

2006.06.13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

‘카마수트라’의 나라 인도 고전문명의 산물 … 이상야릇한 동작에 관광객 시선 고정

  • 글·사진=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6-06-12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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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

    델리의 중심가 찬드니 초우크 거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난장을 이루고 있는 게 꼭 혼돈을 보는 듯하나, 인도인들은 삶이란 이런 것이라며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바라나시가 혼돈의 도시라면 카주라호는 난해한 도시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카주라호가 자랑하는 마투나 상(남녀 교합상)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 교통이 불편해 찾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은 카주라호에 닿자, 청년들과 릭샤꾼들이 몰려와 한국어로 “아저씨, 우리 호텔로 모실게요”라며 못살게 굴었다. 한국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의 유혹을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해 그들이 안내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 카주라호의 마투나 상

    다음 날 아침 일찍, 동군(東群)·중군·서군으로 나뉜 카주라호 사원 가운데 마투나 상이 집중돼 있는 시내에 위치한 서군으로 향했다. 신선한 햇살을 받은 마투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서군은 몇 개의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담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황갈색 또는 분홍빛을 띤 사암으로 지어진 사원 외벽이 모두 섬세한 부조로 뒤덮여 다가갈수록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더 눈을 뜨기 어려웠다. 시바와 비슈누 등 힌두 신과 요정들이 홀로 조각돼 있기도 했지만, 곡예사처럼 기묘한 동작으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남녀 신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풍만한 가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어떤 상은 가늘다고 할 수 없는 허리를 유연하게 휘어 서로 얼싸안고 한쪽 다리를 치켜올려 앞으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선 양쪽으로 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양다리를 쫙 벌려 그 짓을 벌이고 있어 무척 놀라웠다.

    그래도 사원인데 저렇게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들 교합상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했다.



    몇 년 전 자이푸르에 갔다가 한 노인으로부터 인도 최고의 성전(性典) ‘카마수트라’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3, 4세기 인도 고전문명의 황금시대, 당시 인도의 지체 높은 사람들은 그 지체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체위(모두 64종의 체위)의 성애를 배우고 익혔다는 것이다. 64란 숫자는 주역에 나오는 최고수와 동일한데, 이는 섹스가 남녀의 자유롭고 즐거운 성애를 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애는 예술과 같은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교도 애교도 없이 정액을 배설하는 행위를 성의 낭비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성행위는 세련된 기교에 의해 한층 감미로워진다고 믿었다는 것. 그들은 심지어 남녀의 성적, 육체적 결합을 공(空)과 식(識)의 만남, 인간과 신의 만남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애의 기쁨은 생리적, 감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진리를 체득한 뒤에 갖는 정신적 만족감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섹스는 종교적인 환희에 이르는 길이었던 셈이다. 쌍둥이란 뜻의 ‘마투나’는 이런 이유에서 불교의 불이(不二)와 통하며 생명의 힘 같은 것이다.

    #2 루피에 새겨진 15개의 얼굴

    인도의 지폐(루피)에는 15개의 언어가 병기돼 있다. 생각해보니 1500개의 언어와 방언이 쓰이고 있는 나라인 만큼 그 정도의 언어로 금액을 표시해놓지 않으면 전국적인 화폐로서 기능할 수 없을 듯도 하다.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

    카주라호의 데비 자그다베 사원 외벽을 뒤덮고 있는 마투나 상.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것은 언어만이 아니다. 종교도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실로 다양하며, 외국 여행자의 눈에도 교육 수준과 빈부 격차가 극심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인도는 지리적 표현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다”고 했지만, 신기하게도 인도는 제 나름의 질서를 갖고 별 탈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인데도 이슬람교도가 대통령(압둘 칼람 현 대통령)이 되고, 시크교도가 총리(마모한 싱 현 총리) 자리에 오르며, 기독교도가 정치 실세(소냐 간디 현 국민회의당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수 종교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라가 인도인 것이다.

    이런 인도를 보고 있노라면 잘 그려진 한 폭의 모자이크 작품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 이질적인 것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어느 한 부분도 없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모두가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는 모자이크 말이다.

    #3 ‘내버려두라!’

    인도는 예로부터 문명의 텃밭이었다. 세계 4대 고대문명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의 발상지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불교와 힌두교 등이 발생, 발전하다가 외지로 퍼져나갔고, 이슬람 세력에 밀려 피난 온 아람어와 조로아스터교 등을 따뜻하게 받아주는 등 인도는 늘 방문객을 환영했다. 당나라의 고승 현장에 이어 신라의 혜초,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와 그 뒤를 이은 수많은 여행자와 정복자, 선교사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인도에서 태어난 모든 종교는 건조한 땅 중동에서 발원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와는 달리 범신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많은 신을 섬기는 범신론이야말로 인도가 자랑하는 문화 다양성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라 이질적인 것도 잘 소화해냈다. 그래서 인도에 들어온 것 가운데 인도화하지 않은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포용이란 측면에서 인도를 따를 나라는 별로 없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을 지나다가 인도의 대표적인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보게 됐다. 한국에서 온 젊은 여행객이 악기점 주인으로부터 시타르 연주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는데도 시타르의 묘한 매력에 빠져 벌써 열흘째 가게에 나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도에선 도(do)를 사, 레는 그대로 레, 미는 가, 파는 마, 솔은 다, 라는 다, 시는 니가 된다며 나를 가르치기도 했다. 사실 나도 바라나시에 온 뒤 호텔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의 권유로 시타르의 대가 레비 샹카르의 음악을 듣고 이미 홀려 있었던 터라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1920년생인데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샹카르는 인도 전통음악을 서양에 소개한 인물이다. 과거 비틀스의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이 60년대 인도를 찾은 것도 그에게서 인도 음악의 깊은 맛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저 유명한 ‘렛잇비(Let it be)’다.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

    ① 뭄바이의 인도문. 영국은 이 문을 통해 들어와 인도를 식민 지배했으나 지금은 인도가 세계로 나가는 창으로 사용하고 있다.<br>② 힌두교는 범신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문화 다양성의 산실로 작용한다.<br>③ 민속의상을 입고 축제에 나온 인도인들.<br>④ 인도의 거리에선 영화 포스터를 쉽게 볼 수 있다. 영화는 인도인 최고의 오락이라 영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br>⑤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에 자리 잡은 악기점 주인이 한국인 젊은 여행자에게 시타르 연주법을 교습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게 돼 있다. 그게 자연의 섭리니까 말이다. 인도 문명, 나아가 동양문명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서구문명에 물든 우리의 눈에 인도는 혼돈의 땅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게 현대의 문제다.

    혼돈! 그것은 다양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 생명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존중한다. 인도인이 개, 소, 까마귀를 죽이기는커녕 괴롭히지도 않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고대 로마도 뒤지지 않는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던 지금의 중동과 이집트, 그리스 등지로부터 수준 높은 문명을 받아들여 문명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로마였기에 로마란 도시와 속국의 여러 도시들을 잇는 길(좋은 예가 아피아 가로다)과 다리, 다양한 이민족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 같은 원형경기장을 구축하는 데 국력을 쏟았다. 그걸 인프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오로지 소통과 교류를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인프라는 공간의 축약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인도는 인프라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그들 역시 인프라 구축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 축약을 위해서가 아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다. 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인도가 자랑하는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소프트웨어다. 인도는 21세기판 로마가 된 것처럼 자기네 방식으로 전진하고 있다. 인도가 보여주고 있는 이런 고차원의 ‘건너뛰기식’ 성장과 변화는 그동안 후진국으로 분류됐던 제3세계에는 희망의 상징이 된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최근 집필한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인도의 변화로 세계는 평평해지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지적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변화라 하면 누구나 과거와는 단절된 새로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인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불안정하므로 그에 따라 변화해야 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 정돈과는 거리가 먼 혼돈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그들의 세계관 때문이다. 다양성과 혼돈은 그 근원을 따지면 이렇듯 하나인 것이다.

    사원에 남녀 교합像 즐비 “어머, 망측해”

    크리켓은 영국에서 들어온 스포츠이나 인도 최고의 인기 종목이다. 도시 곳곳에 드넓은 크리켓 구장이 들어서 있다.

    뭄바이의 서북부 교외에 영화제작소가 밀집된 ‘필름 시티(Film City)’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교외선을 타고 그곳을 찾았다. 봄베이판 할리우드라는 뜻으로 ‘볼리우드(Bollywood)’라는 불리는 이곳에서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고 있는 인도 영화의 60% 이상이 제작된다는 말을 들어서다. 마침 입구의 거리에서 ‘니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제목의 인기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만나볼 수 있었던 제작자 타히르 씨는 “인도에서 영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도시 곳곳에 복합상영관이 생겨나고 있다는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인도 영화와 미국 영화는 어떻게 다른가”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미국 영화는 최첨단 기술을 앞세워 팬태스틱 류를 내놓고 있으나 인도 영화는 인도인의 일상사를 다루고 있어 인도인들에게 잘 먹혀들고 있다”고 대답했다. 기술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은 현실도피를 위해 허구의 팬태스틱에 빠져들고 있으나, 그런 스트레스를 느끼지 못하는 인도에선 팬태스틱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 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렛잇비’ 정신은 자유를 상징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뜻한다. 깨달음과 명상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만을 위한 서구의 휴머니즘(인본주의)과는 당연히 구별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는 인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도 경제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20여 일에 걸친 이번 인도 여행을 마치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인도인이 가진 정신적 무게, 또 그들이 인류에게 제시하고 있는 생명의 메시지가 바로 21세기 인류의 희망이 되어 미래를 밝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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