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역에서 콜카타(옛 캘커타)로 가는 3028호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사이 두 명의 한국 여대생 배낭족을 만났다. 한 학생은 한쪽 다리가 불편해 목발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인도 비자가 만료될 때(6개월간)까지 콜카타에서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휴학을 해가며 얻은 귀한 시간을 객지에서 봉사활동에 모두 써버리겠다니, 젊음이란 용감함과 동의어란 사실을 그때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것도 모든 경비를 자기가 부담하면서까지 말이다. 내 젊은 시절엔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는데.

내가 구한 열차표는 ‘대기석’이라 불안했는데, 그날따라 빈자리가 많아 여객 전무는 아무 자리나 골라 앉으라고 했다. 자리를 잡고 그 학생들에게 가봤다. 몸이 불편한 학생은 3층 가장 높은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인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고생할 것 같아 여객 전무에게 사정을 얘기해 1층 창가 쪽 자리를 잡아주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부인, 조카딸과 함께 바라나시 순례를 마치고 고향인 콜카타로 돌아가던 네오기라는 사람이었다. “사업상 온 건가요?”라는 그의 질문에 “인도를 가슴으로 느끼고 싶어 인도 전역을 다니고 있다”고 답하자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 전진기지 … 한국 여행객 많이 찾아

고백컨대 콜카타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인도에서도 가장 더럽고 소란스러울 뿐 아니라 곳곳에 고통이 넘쳐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봐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가는 게 내 여행방식이지만 그때는 그럴 필요마저 느끼지 못했다. 이미 두 번이나 인도를 찾았지만 그때마다 콜카타가 일정에서 빠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영국이 식민지 전진기지로 삼았던 콜카타를 빼놓고 인도를 느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오기 씨는 유창한 영어로 타고르 이야기를 꺼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벵갈인의 정신적 스승이며,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동양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1913년)한 타고르는 1922년 도쿄를 방문했을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을 일러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절에 빛나는 등불 하나였던 한국. 그 등화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밝은 빛이 되리라”라고 읊었던 시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네오기 씨는 콜카타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든 시간을 꼭 내서 타고르하우스를 방문하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벵골어로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의 서두를 읊었다.

“당신은 나를 영원하게 하셨으니, 그것이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배를 당신은 끊임없이 비우시고 신선한 생명으로 영원히 채우고 있습니다.”

벵골어는 영어, 중국어, 힌디어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사용 인구 2억명)로, 콜카타가 있는 웨스트 벵갈주와 방글라데시의 공용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네오기 씨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인데도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와 힌두신앙, 그리고 시인 타고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힌두신앙과 상대성은 서로 관련이 있다는 그의 설명이었다. 뉴턴의 만유인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그 좋은 예라는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인도 철학에 자주 등장하는 불이(不二)론을 들었다.

그의 해박함에 감탄한 나는 그에게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읽고 있는 책이 없다고 했다. 남의 생각에 빠져들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가 존경하는 타고르도 “나는 내 일생에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을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자극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시인 휘트먼과 영국의 서정시인 워즈워스와 콜리지처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도인들은 앎과 깨달음의 차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도에서 수많은 종교가 태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또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깨달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지금도 인도에 실천하는 구도자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콜카타 역을 빠져나오자 우려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사람과 쓰레기 더미, 소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대생 배낭족과 함께 프리페이드 택시를 타고 하우라 철교를 지나 인도박물관 옆 골목을 파고들어가 가난한 배낭족이 주로 머문다는 수데르 거리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는 파라곤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한국 배낭족이 콜카타를 얼마나 많이 찾는지 호텔 주변에서는 김치국밥도 팔고 있었다.

‘신은 무한한 기쁨’ 노래한 타고르의 시

콜카타에는 지하철도 다녔지만 목제 창문짝을 단 버스가 주종을 이루었고, 사람이 직접 끌고 다니는 인력거도 중요한 교통수단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건물이나 쇼핑센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잿빛 속에 갇혀 있었다. 신나는 일이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이 도시에 콜카타란 이름을 선사한 칼리 사원은 심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채 지하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타고르하우스를 찾았다. 그 집은 시장 동네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넓은 뜰을 거느린 2층 구조의 붉은 벽돌집이 무척 컸다. 마치 학교 건물 같았다. 타고르는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 한쪽을 기념관으로 꾸며 그의 삶의 체취와 그림, 저작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는 1868년 콜카타의 명문가에서 열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와 매우 흡사한 벵갈 부흥기였다. 당시 마구 밀려드는 서구문명의 자극을 받아 인도 문화의 터전인 산스크리트 고전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타고르는 그때 큰 역할을 했다. 타고르는 벵갈의 선각자였던 것이다. “두려움 없는 자유, 이것이 당신에게 청하는 자유이외다. 나의 조국이여!”라고 시작되는 타고르의 염원은 인도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 및 동양의 발전, 나아가 동서융합이었다.

타고르하우스에는 집안사람들이 그린 그림이 많이 걸려 있는데, 모두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타고르의 작품도 보였다. 그의 집필실과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 많은 식구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던 부엌 등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한 사람처럼 나는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의 저작과 시집들도 전시돼 있었는데,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기탄잘리’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그의 시는 인생의 오묘한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은 즐거움에서 그 근원을 가져왔다. 만사는 즐거움에서 살고 즐거움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우주창조의 원리 또한 즐거움에 있다면서 즐거움만이 모든 자연과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결국 ‘신은 무한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파라곤 호텔에선 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옥상에 모여 멋진 이벤트를 벌였다. 누군가가 노트북으로 영화를 쏘아댔던 것이다. 벽에 임시로 걸어놓은 하얀 천에 동영상이 비치자 모두 눈을 떼지 못했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 때면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로 이벤트를 마감했다. 그 순간, 모두가 친구가 된 것은 물론이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다. 콜카타는 낡은 도시라 지저분하고 가난하고 소란스러웠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선 이처럼 기쁨과 웃음, 그리고 행복이 피어났다.

다음 날 뮤지컬 ‘오 캘커타’에서 이름을 딴 레스토랑 ‘오 캘커타’를 찾았다. 벽에는 벵갈 르네상스를 빛낸 예술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거기서 벵갈 식 점심을 먹고 테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로 달려갔다. 매주 월·수·금요일 오후 3시에 자원봉사 요원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다고 들어서였다. 거기서 같은 호텔에 묵는 한국 여대생 두 명과 만나기로 돼 있었다. 눈처럼 흰 제복을 걸친 수녀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두 사람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테레사 수녀가 설립한 선교회가 펼치는 봉사활동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봉사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지만.

봉사활동 위해 세계 각지에서 찾아와

오리엔테이션은 언어권별로 진행됐다. 그날 한국어 파트에는 6명이 참가했다. 설명을 맡은 선배 봉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20대.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더 많았지만 중국인은 보이지 않았고, 영어권과 스페인어권에서는 거의 비슷한 인원이 참가했다. 구호센터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 ‘어린이 집’ ‘간디 스쿨’ 등 8곳이며, 오전·오후로 나뉘어 진행되는 봉사활동은 주로 세탁과 청소, 목욕, 이발, 아이 돌보기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자기 돈으로 숙식을 해결하는 대부분의 한국 자원봉사자들은 거기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파라곤 호텔에 머물렀다.

여기선 의무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봉사 기간도, 하고 싶은 봉사활동도 스스로 정하되 소정의 규칙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봉사라고 하면 남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재확인하는 일이어서 어떻게 보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나아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도 재정립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인도 여행에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누구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에서 6개월 동안 영어 교사로 일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네팔에서, 어떤 이는 방글라데시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다고 했다. 콜카타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선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이 그들을 이끈 것일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오리엔테이션장을 벗어난 나는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사진과 유품 등으로 보여주는 방, 그리고 그녀의 석관이 안치된 추념의 방을 둘러봤다. 거기에 적혀 있는 “나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작은 펜일 뿐이다. 죽음은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다”는 말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1929년 인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뒤 1950년 가난한 자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돌보기로 하나님께 맹세하고 콜카타의 빈민가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웠다. 1997년 9월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콜카타를 찾아와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맨손인 것만은 아니다. 타고르가 말한 무한한 기쁨을 맛본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도시를 일컬어 ‘시티 오브 조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콜카타에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