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9

..

원리·원칙보다 행동부터 나서야

‘맨땅에 헤딩’이 필요한 순간

  •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lyzcamp@gmail.com

    입력2015-12-29 13:14:06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원리·원칙보다 행동부터 나서야

    셔터스톡

    ‘6·25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대북 첩보를 수집하는 특수전 임무를 수행했던 유격군8240부대(켈로부대)원의 공적을 미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문서가 처음 발견됐다. (중략) 이번 문서 발견으로 미 정부가 보상에 나설 길이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28일 본보가 단독 입수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발굴 자료는 1952년 10월 26일 미 극동군사령부가 작성한 유격군8240부대 지휘관 20명에 대한 미군 훈장 추천서다.’
    ‘동아일보’ 2014년 7월 29일자 기사다. 위에 언급된 유격군8240부대원의 명단은 201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페이엣빌에 있는 특수전사령부에서 찾았다. 이후 국회로 전달됐고 1970년대부터 8240부대원들의 소원이던 보상법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된 뒤 김일성이 소련에 군사 교관 등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중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우드로윌슨센터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을 찾았다고 밝혔습니다.’
    KBS 9시 뉴스 2015년 12월 18일자 뉴스다. 김일성이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은 2013년 필자가 워싱턴 DC 우드로윌슨센터에서 촬영해온 것이다. 옛 소련의 6·25전쟁 관련 문서들과 함께 근 2년간 연구 분석을 해오다 대국민 정보 제공 취지에 따라 언론을 통해 전격 공개했다.  
    8240부대 관련 문서는 지금까지 외부인에게 공개된 적 없는 비공개 기록으로, 필자가 미 특수전사령부에 들어가 찾은 것이다. 그곳에 어떻게 들어갔는지가 포인트다. 2013년 봄 특수전사령부 역사실에 8240부대원 명단이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때 메릴랜드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연구를 하고 있던 필자는 전화와 e메일로 특수전사령부 측에 연락했지만 외부인과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무작정 노스캐롤라이나 페이엣빌이라는 곳으로 가서 근처 모텔에 묵으며 지역주민들과 대화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던 어느 날, 특수전사령부가 6·25전쟁 전사자 및 실종자를 위한 모금행사에서 대한민국 애국가를 부를 사람을 찾는다는 정보를 얻고 지체 없이 자원했다. 그리고 행사 당일 육군 정복을 입고 나가 애국가를 불렀다.

    중요 사료 얻으려 무작정 핵심 부처로

    난데없이 외국 육군 소령이 나타나 애국가를 불렀으니 관심을 끌었다. 그 자리에는 특수전사령부 고위관계자들도 참석한 상태였다. 행사가 끝난 뒤 티타임에 초대받은 필자는 이곳을 찾은 이유와 사정을 말하면서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자료에 접근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앞에 소개한 자료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두 번째 소개한 김일성 관련 문서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고, 연구논문에 수차례 인용된 적도 있다. 그러나 원문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언론보도 이후에는 ‘7월 8일 김일성 손편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25〜35명의 소비에트 무관을 북한 인민군 사령부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간곡히 청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불법남침 사실을 못 박는 결정적 문서로 회자됐다.
    2013년 여름,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가운데 한 곳인 우드로윌슨센터에 6·25전쟁기 옛 소련의 문서들이 대량 보관돼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구기관에서 수집한 기록물들은 연구기관 자체적으로 모두 소화하고 대외홍보에 사용하는 등 소위 단물이 다 빠지기 전까지 외부에 공개하는 법이 없다.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보유한 6·25전쟁기 문서들은 단물이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전후 사정을 알기에 먼저 우드로윌슨센터 자원봉사에 지원했다. 당시 센터는 인터넷 아카이브에 6·25전쟁 관련 문서들을 업데이트하고 있어 일손이 부족했다. 필자는 영어로 된 문서를 한글로, 한글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자원해 환대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였다. 2개월이 지났을 무렵, 센터 다과회에서 필자는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필요한 것을 말했다. 그리고 기대 이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6·25전쟁 관련 미공개 기록물과 파일들을 상당수 건네받았다.
    ‘맨땅에 헤딩하기’는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조직이 크고 실패 시 부담해야 하는 위험이 큰 분야일수록 그렇다. 그런데 때로는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순간, 상황이 찾아온다.
    그럴 때는 일단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쪽 분야에서 경험을 쌓으며 얻은 결론이다. 그 어떤 처세술, 그 어떤 전쟁의 황금률이 자기 손에 주어진다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회의 창이 열리지 않는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담벼락이 자기 앞에 놓여 있다면 먼저 쓰고 있는 모자를 그 담벼락 너머로 던져야 한다.
    원리·원칙보다 행동부터 나서야

    유격군8240부대원 명단이 담긴 문서의 일부로 1952년 10월 26일 작성됐다(왼쪽). 1950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이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담벼락 너머로 모자부터 던져라

    6·25전쟁과 관련된 기록물의 비밀등급 하향 조정 혹은 비밀 해제를 영어로 협상하고 이를 찾아 수집하는 일은 날카로운 논리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객관적 합리성을 건조하게 주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날카롭고 건조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무디고 느릿느릿 움직이기 때문에 뛰어난 두뇌보다 진득한 천성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또한 성공한다면 무용담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한 모험에 대담히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보다 결단력이 더 필요하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보다 타고난 배짱이 더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배짱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협상 성과를 확대하지 못한다. 수집한 기록물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그 기록물에 응축된 시공간을 해체해 풀어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후속 연구 작업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지식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잘 풀려 논문에 인용되고 방송 및 언론에 소개되면 잠시 달콤한 기쁨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까지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들의 고통에 비하면 기쁨의 총량은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모든 작업이 보람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며칠을 투자해 분석한 러시아 문서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가 있고, ‘1급 비밀’ 도장이 찍힌 영어 문서를 번역했더니 이미 공개된 것일 때도 있다. 기쁨과 보람을 기다리면서 참는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기쁨과 보람을 모르는 사람도 견디기 힘들다.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면서 희로애락에 무덤덤해져야 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