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2

2010.06.21

‘한단지몽’ 고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인적 쇄신 시사한 MB, 인사가 만사임을 이번엔 보여주어야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6-21 12: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한단지몽’ 고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이 6월 14일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TV와 라디오로 생방송된 제42차 라디오·인터넷 연설을 통해 향후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친(親)서민 중도 실용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두 달 뒤면 임기 중반을 넘어선다. 최근 실시된 6·2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하는 결과가 나왔다. 왜 국민은 이명박 정부에 실망했을까. 나름대로 세계를 누비고 G20 정상회의를 유치하며 국정에 혼신을 다하고 있지만 결과는 명백한 패배였다. 권력은 속성으로 영속화·극대화를 추구하고자 하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해서 국민의 지지도는 반비례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이다.

    6월 14일 이명박 대통령은 6·2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을 겸허히 수용, 지방선거 12일 만에 국정 쇄신을 천명하고 당정청(黨政靑) 인적 쇄신을 시사했다.

    그동안 특정 지역과 특정 학교의 권력 장악으로 신(新)골품제도가 부활해 TK(대구경북) 출신에 고려대를 나오면 성골, TK와 고려대 중 하나면 진골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난무했다. 그러면 비(非)TK, 비(非)고려대 출신은 6두품이란 말인가. 천년 왕국 신라의 멸망은 골품제도의 모순에 기인했고 6두품이 반(反)신라 운동의 주체였음을 주지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집권 전반기 옹체(壅滯)된 인사 편중이라는 여론의 질책을 간과했으나 후반기에 들어선 만큼 민심의 함성을 수용해 ‘인사가 만사’임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인사와 관련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일화와 당나라 때 ‘한단지몽(邯鄲之夢)’의 고사는 우리에게 깨우침을 준다.

    김시습,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사람이 신료가 됐나”



    조선 세조 때 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인 김시습은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해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지만, 찾아오는 손님에게 한양 소식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료들의 이름을 보고, 인망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곡(哭)을 하면서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한단지몽은 또 어떤가.

    성당(盛唐)의 문장가 심기제(沈旣濟, 750∼780)가 쓴 소설 ‘침중기(枕中記)’에 인간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얼마나 무상하고 허무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단지몽의 고사가 전해온다.

    때는 당 현종 개원(開元) 연간의 일이다. 여옹(呂翁)이라는 한 노도사가 한단(邯鄲·하북성, 조나라의 옛 도읍)의 어느 객잔에서 쉬는데, 형색이 초라하고 몰골이 말이 아닌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노생(盧生). 그는 여옹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사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 그리고 자신의 궁핍함을 탄식했다. 혼신의 힘으로 일을 해도 먹고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자 여옹이 베개(枕)를 주면서 노생에게 잠을 청하라고 했다. 그 베개는 사기로 만들었으며 양쪽 끝은 굴뚝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노생이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 보니 기이하게도 그 구멍이 점차 커지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노생이 구멍 속으로 들어갔는데 갈수록 베개 구멍은 동굴 입구처럼 커지고 그 속으로 환한 길이 열렸다. 길을 따라 얼마를 더 갔더니 놀랍게도 웅장한 저택이 한 채 나타났다. 그 저택에서 노생은 명문가인 청하(淸河) 최씨(崔氏) 가문의 딸과 결혼하고 진사시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관운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영전에 영전을 거듭해 경조윤(京兆尹·서울시장)에 이르렀다. 관운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몇 년 후 남쪽 오랑캐(南蠻)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사랑(吏部侍郞)의 감투를 쓰고 천자의 측근이 됐다.

    ‘한단지몽’ 고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인망이 없는 사람이 신료가 되면 곡(哭)을 했다는 김시습.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명이 떨어져 단주(端州)의 자사(刺史)로 좌천을 당했다. 자사라면 일개 지방 수령 정도이니 좌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재상과 사이가 나빴던 것이 화근이었다. 단주로 쫓겨 가 한숨과 울분 속에 만 3년 동안 말없이 참고 견디자 다시 천자의 부름이 있었다. 이번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자리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노생은 드디어 재상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누가 뜻하였으랴. 지위와 부귀영화가 이렇듯 절정에 달했을 때 노생은 실로 터무니없는 역적의 누명을 쓰고 포박을 당하는 신세가 됐다. 변방의 야심을 품은 장수들의 역모에 주동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노생은 영문조차 모르고 오랏줄에 묶였다. 끌려가기 전에 그는 처자식에게 “내 고향 산동(山東)에 가면 몇 식구가 농사를 지을 전답이 있소. 부질없는 공명심을 버리고 차라리 고향에 박혀 농사를 지었더라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걸”이라 하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칼을 뽑아 자진하려고 했으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실패했다. 그래도 운이 좋아 사형은 면하고 하옥됐다가 기주(驥州)에 유배를 당했다. 그래도 재상 10년에 과히 인심을 잃지 않아 천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관들의 의리로 목숨만은 건졌다.

    죽다가 살아난 노생 … “허영과 욕심은 부질없었다”

    더욱 다행한 것은 기주로 정배를 가서 몇 해를 외롭게 연명하는 사이에 천자가 노생을 잊지 않고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시켰고, 그 결과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덕택에 노생은 또다시 누명을 벗고 조정에 복직돼 중서령(中書令)이라는 벼슬자리를 누리게 됐다. 이어 연국공(燕國公)이라는 봉작을 받고 천자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 후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됐으며 명문세족과 혼인해 10여 명의 손자를 뒀다.

    이윽고 늙은 몸에 병이 들어 부득이 관직에서 사퇴하려 했으나 천자는 끝끝내 놓아주지 않고 노생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노생은 마침내 눈을 감았다.

    이에 깜짝 놀란 노생이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한단의 그 객잔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여옹이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객잔 마당에서는 주인이 수수를 삶고 있었는데 아직 수수가 덜 익은 모양이었다. 모든 것이 맨 처음 그대로였다.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리는 노생을 여옹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거야.”

    정신을 차린 노생은 여옹에게 절을 하고 감사의 말을 했다.

    “덕분에 인생의 영욕도, 빈부도, 생사까지도 그 모든 것을 속속들이 경험해봤습니다. 그야말로 도사께서 저의 허영과 욕심을 남김없이 깨우쳐주셔서 뼛속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노생은 거듭 허리를 굽혀 여옹에게 사례한 다음 쓸쓸히 한단의 거리로 돌아갔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족하면 욕되지 아니하고 그칠 때 그치면 위태롭지 않다. 권력을 가졌으나 정녕 지혜로운 자라면 결코 한단지몽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