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2

2016.11.09

스타트업이 바꾸는 세상 ③

규제 블랙홀에 빠진 핀테크

빌려주는 사람이 줄을 선 대출, 클릭 한 방에 결제…편리와 신속도 한국에선 먹통

  •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 klee@startupall.kr

    입력2016-11-07 12: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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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으로 귀농한 친구가 사과 한 상자를 보내왔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거라 부담 없이 먹어도 된다는 메모지가 들어 있었지만, 친구 가족이 흘렸을 땀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돈’자만 꺼내도 손사래를 치는 이에게 “계좌번호가 뭐냐”고 묻기도 우습다. 그럴 때는 그냥 ‘토스’로 송금하면 된다. 50만 원 한도로 상대방 휴대전화번호만 알면 보낼 수 있다. 보안프로그램, 공인인증서, 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 보안카드, 은행 애플리케이션(앱)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이 편리한 송금 앱은 비바리퍼블리카(대표 이승건)라는 스타트업이 만들었다.

    치과의사 출신 창업자가 만들었다 해서 화제를 모은 토스는 지난해 2월 처음 선보인 후 올해 8월 누적 거래액 1조 원을 넘어섰다. 성장세도 가팔라 삼사분기에만 거래액 7100억 원을 기록했다. 분기마다 2배씩 거래 금액을 늘려가는 중인데, 이는 미국의 국민 송금 앱이라는 벤모(Venmo)의 초기 성장세보다도 빠르다. 주로 개인 간 돈 거래, 밥값 나눠 내기, 온라인 구매 등에서 이용된다. 아직 수수료 수입이랄 게 없다 보니 지난해 50억 원에 이어 올해에도 265억 원 투자를 받았다.



    은행과 대부업체 틈새 파고든 ‘8퍼센트’

    핀테크(FinTech) 스타트업은 토스처럼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더 나은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들의 장점은 편리와 신속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지분이 없는 민간 상업 은행조차 ‘금융기관’이라고 부른다. 기관이라는 단어에서 이들 조직의 우선순위가 편리함이나 신속성 같은 고객 가치 추구보다, 자금 중개나 정책금융 같은 ‘관’스러운 가치에 머물 것이라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은행들은 창립 이래 수십 년간 유사 상품만 취급하며 경쟁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다. 이제 고객 접근성 싸움밖에는 할 게 없어 번화가 빌딩 1층에 입주하는 일 외에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는 게 은행들이다. 전 세계적인 핀테크 붐은 상당 부분 은행의 사업 해체 과정이다.

    예대마진과 수수료라는 은행 수입의 쌍두마차에 포문을 연 곳은 중금리시장을 파고든 P2P 스타트업이다. P2P는 ‘Peer to Peer’의 약자로 개인끼리 서로 빌려준다는 의미다. 금리는 낮지만 대출심사가 까다롭고 다른 상품까지 끼워 강매하는 은행과 고금리 대부업체의 높은 이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 고객층을 파고들었다.



    선두주자 ‘8퍼센트’는 올해 말이면 누적 투자금액이 1000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약 1만 명의 투자자 중 2030세대가 80%를 넘으며, 이들이 얻는 연평균 수익률은 9.3% 수준이다. 아직은 중개수수료를 받지 않으면서 창업투자사로부터 조달받은 자금으로 시장 자체를 키우는 중이다. P2P 대출업체 대부분이 아직은 수수료 수입이 없다. 8퍼센트는 올해에만 100억 원을 투자받았다.

    P2P 대출 사이트는 대부분 직관적으로 설계돼 있어 이용하기 쉽다. 원하는 P2P 대출 사이트를 골라 페이스북 로그인 등으로 손쉽게 가입하면 바로 돈을 빌릴 수 있는 화면이 뜬다. 채권 목록에 돈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의 직업, 신용등급, 금리, 대출기간, 빌리려는 이유 등이 나열돼 있으며, 선호하는 상품을 골라 원하는 금액만큼만 빌려주면 된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보다 빌려주려는 사람이 많아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시간을 정해 투자시장을 개시하면 몇 분 만에 채권이 다 팔려버린다. 요즘은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처럼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경우도 상품군에 들어 있어, 항상 매진 상태는 아니고 아무 때나 들어가도 한두 개 인기 없는 상품에는 투자할 수 있다.

    그동안 P2P 스타트업이 일으킨 대출은 현재 약 3000억 원으로 추정되며 ‘렌딧’ ‘어니스트펀드’ ‘펀다’ ‘빌리’ 등 수십 개 업체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P2P 사업모델이 미국의 렌딩클럽(Lending Club)을 베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외국 모델과는 차이가 있다. 렌딩클럽은 채권을 묶어 기관투자자에게 매각하는 모델인데 반해, 국내 서비스는 투자자가 개인이라는 점에서 P2P 정신에 더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P2P 렌딩의 최강자인 렌딩클럽의 대출금 규모는 약 8조 원으로, 이는 대형 은행인 웰스파고나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대출금의 1% 수준이다.



    투자와 마케팅을 동시에, 크라우드펀딩

    P2P와 비슷한 듯 다른 용어로 크라우드펀딩이 있다. P2P와 달리 크라우드펀딩은 돈을 입금해도 이자나 원금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이 제작비를 투자한 상품이 완성된 뒤 시판 가격보다 싸게 물건을 받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프로젝트에 기부하는 방식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인디고고(Indiegogo)’와 그다음 해 문을 연 ‘킥스타터(KickStarter)’가 유명하다. 이들 업체는 전 세계 창업자에게 문호가 개방돼, 우리나라 스타트업 가운데도 이들을 통해 자금을 유치한 곳이 여럿 있다.

    크라우드펀딩의 좋은 점은 투자자와 고객이 한꺼번에 확보된다는 것이다. 시제품을 들고 투자자를 찾아다녀봐야 좋은 조건으로 돈을 얻기 힘들 때 전 세계를 대상으로 미리 물건을 파는 것이다. 마케팅에도 매우 유용해 사이트에서 성공을 거두면 언론에도 보도가 잘된다. 그래서 자금이 아쉽지 않은 업체라도 일정 규모의 크라우드펀딩을 해서 입소문을 내고 선주문도 받는다. 국내에서는 ‘와디즈’ ‘오픈트레이드’ ‘오마이컴퍼니’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증권시장을 시스템과 자본력을 갖춘 기관투자자가 합법적으로 ‘개미를 터는’ 허가받은 도박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개인투자자를 도와줄 로보어드바이저의 등장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미국에서는 선두주자인 ‘베터먼트(Betterment)’와 ‘웰스프런트(Wealthfront)’가 각각 2조~3조 원대를 운용하며 몇 년간 시장을 키웠다. 로보어드바이저의 놀라운 성장세를 칭송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던 2015년,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뱅가드(Vanguard)’와 ‘찰스슈왑(Charles Schwab)’ 증권사가 자체 로보어드바이저를 내놓자 시장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뱅가드의 로보어드바이저는 그해 41조 원을 유치했는데, 이는 기존에 영업하던 모든 로보어드바이저의 운용 규모를 합친 것보다 큰 금액이다.

    국내에는 스타트업인 ‘뉴지스탁’이 키움증권 등 여러 증권사와 제휴해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쿼터백투자자문’도 현대증권 등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금력이나 기술 수준으로 본다면 국내 증권사가 내놓은 자체 개발 로보어드바이저가 뱅가드 정도의 파괴력을 지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누가 이기든 스타트업이 시작한 로보어드바이저 덕에 증권투자 지형이 변화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소개한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큰 저항 없이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지만, 모든 핀테크 스타트업이 다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용카드를 이용한 본인인증이 국내에서 가능해진 것은 불과 며칠 전인 10월 중순이다. ‘한국NFC’에서 휴대전화에 신용카드를 갖다 대는 방식의 간편결제 기술을 내놓은 지 2년 만의 일이다. 휴대전화 인증이 독식하던 시장 귀퉁이를 살짝 열고, 같이 좀 하자는 데만도 그렇게 힘들었다. ‘그는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가 없는 한국인처럼 울었다’는 농담처럼 국내 이동통신사의 전횡은 국내 체류 외국인과 관광객의 온라인 구매에 심각한 불편을 안겼다.

    그동안 환치기상 취급을 받던 해외송금이 민간에 풀린 것도 최근 일이다. 시초가 된 에스토니아 창업자들이 영국에 세운 핀테크 업체 ‘트랜스퍼와이즈(Transferwise)’는 이제 매월 1조 원의 거래를 성사하고 있다. 창업한 지 6년 만에 은행보다 싸고 편리한 서비스라는 걸 확실히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에는 핀테크 스타트업인 ‘모인’ ‘센트비’가 각각 일본과 필리핀을 대상으로 시범운영 중이다. 이제 시작인 셈이다.



    첨단기술 비웃는 낙후된 결제 시스템

    핀테크 영역의 규제는 아직도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우리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보안프로그램 깔고, 신용카드번호 넣고, 공인인증서 비밀번호 넣고, 이것이 제대로 안 돼 다시 보안프로그램 깔고를 거듭하다 컴퓨터를 집어 던지고 싶었던 지난 십수 년 동안 남들은 얼마나 편리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1998년 ‘페이팔’이 등장했다. 페이팔 사이트에 신용카드번호를 한 번만 등록해놓으면 그다음부터 어느 쇼핑 사이트에서나 페이팔 버튼 클릭하고 비밀번호 한 번 쳐주는 것만으로 결제 끝이다. 페이팔의 에스크로 기능 덕에 안전하고 편리하다. 우리나라였다면 페이팔이 신용카드번호를 저장한 것부터 불법이다.

    신용카드번호를 사이트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은 사용자에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아마존’에서 쇼핑을 하면, 사겠다고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결제가 끝나버린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지는가. 미국 소비자는 아마존이 책임질 거라고 믿는다. 신용카드의 발명 이래로 우편, 전화, 인터넷 등 비대면 거래는 판매자가 위험 부담을 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같은 비자카드인데, 미국처럼 판매자가 자기 책임으로 결제 방법을 선택하면 되지, 금융당국이 왜 업체의 보안 솔루션까지 골라주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2009년 등장한 ‘스퀘어(Square)’는 스마트폰 이어폰 단자에 꽂아 쓸 수 있는 네모난 카드 단말기를 제공하는 신용카드 밴사다. 스퀘어의 등장으로 카드 결제 시 따로 계산대까지 가지 않아도 됐고, 99달러만 내면 장비는 물론 카드가맹점 계약도 가능해 소상공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유사 상품이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스트라이프’는 모바일 결제의 끝판왕이다. 이 회사에서 제공하는 API(공개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앱에 넣어주면 전 세계 거의 모든 통화로 거래가 가능하고 알리페이, 비트코인까지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결제 분야가 블랙홀인 나라에 정말 필요한 서비스인데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핀테크의 각 분야 가운데 아직까지 결제가 가장 낙후돼 있다. 지하철을 후불 신용카드로 이용하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낸 나라인데, 규제가 많아 온라인 상거래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웃픈’ 일이다.

    위조 방지 및 부가 서비스가 가능해진다는 이유로 신용카드에 IC 칩을 심는 기술이 프랑스 쪽에서 실용화된 것이 1990년대 중반이다. 그러나 개당 3000원이 넘는 IC 칩카드의 원가는 500원에 불과하던 자기띠 방식 카드에 비하면 너무 비쌌다. 더구나 카드 표면의 양각 처리된 글자 위에 먹지를 대고 긁어 전표를 끊던 방식에서 자기띠로 넘어온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카드 단말기의 교체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상황 논리로 신기술 도입이 미뤄졌던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동남아와 남미지역을 중심으로 신용카드 절도 및 위조가 극성을 부렸다. 손바닥 크기의 카드 복제기가 동남아 암거래시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됐다. 위·변조 카드로 인한 손실이 더는 상각처리하기에 부담스러운 시점이 돼서야 IC 칩 카드가 국제 신용카드 브랜드에 의해 채용됐다. 기술은 서비스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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