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2

2015.06.15

“80년대 전자산업 일군 저력으로 최첨단 기술에 도전”

다시 뛰는 산업전사 김성실 MMPC 대표

  • 최충엽 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albertseewhy@gmail.com

    입력2015-06-15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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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전자산업 일군 저력으로 최첨단 기술에 도전”
    김성실(59·사진) MMPC 대표를 만난 곳은 경기 성남시에 있는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였다.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한 대기업들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후원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김 대표가 이끄는 MMPC는 초저조도 카메라 개발 기술력을 인정받아 이곳에 입주했다. 초저조도 카메라는 빛이 적은 환경에서도 선명한 화면을 얻을 수 있는 카메라를 가리킨다.

    전자레인지 핵심 반도체 ‘마이콤’ 개발

    김 대표는 이외에도 초저조도 카메라와 열화상카메라를 융합한 새로운 개념의 조준경, 전력 감시 또는 위험 물질 감시 시스템, 새로운 개념의 웨어러블 디바이스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같은 세대들이 어느새 퇴직을 눈앞에 둔 시기지만, 김 대표는 자신을 “처음부터 엔지니어였고 지금도 엔지니어인 사람”이라고 당당히 소개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의 입에서는 기술 전문용어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엔지니어로서 거둔 성취에 대한 기쁨과 활력을 표현했다. 먼저 그가 어떤 삶의 경로를 걸어왔는지부터 들었다.

    “저는 우리나라 전자공학 1세대예요. 1981년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전선에 입사했는데, 이 회사가 바로 대우통신 중앙연구소로 인수됐죠. 당시 대우는 매우 공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국내 최초 광통신 상용화에 매달렸습니다.”

    김 대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기술은 거의 모두 다뤘다고 보면 된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에 대한 보람과 성취감이 높던 시기다. 그는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이 관심을 갖고 있던 컴퓨터 간 통신 업무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이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컴퓨터 통신 인프라가 없었고, 관련 분야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어요. 미국 자료를 찾아가면서 간신히 프로젝트를 마쳤지만, 결과가 영 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처음으로 제 실력에 의문을 갖게 됐죠. 회사가 여러 번 만류했지만 미국에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김 대표는 1987년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 입사했다. 당시 미국 최대 반도체업체였고, 컴퓨터 응용기술 개발 및 상품 제조로 유명한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삼성과 LG 등 국내 전자업체의 전자레인지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 ‘마이콤’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이 부품을 탑재한 두 회사의 전자레인지가 88년 대히트를 기록했고, 이에 따라 국내 마이콤 수요가 늘면서 TI는 한국에 마이콤디자인센터를 설립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돌아온 그는 TI에서 아시아 지역 최초로 시니어 기술자 그룹 리더(부사장급)가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동통신 기지국 개발 등 여러 프로젝트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이미 마이콤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상태였지만, 김 대표는 엔지니어로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현재 스마트폰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 통신 기술, 디지털 신호처리 기술(DSP)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덕에 우리나라 이동통신 발전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1989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동통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관련 연구를 시작했고요. 삼성이나 LG 등이 이동통신 기지국을 만들 때 저도 기술적인 지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 캠코더폰이나 DMB폰이 나온 건 바로 이런 기술을 통해서였죠.”

    그런 그에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2006년 당시 정보통신부는 해외 핵심 기술을 도입하고자 우수한 글로벌 기업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핵심 기술을 키워가자는 취지의 사업을 벌인 것이다. 디지털 신호처리 기술을 바탕으로 한 미래 통신기술 개발 분야에서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와 미국 TI가 힘을 합치기로 했다.

    포기할 수 없는 엔지니어의 꿈

    그러나 국제 프로젝트가 쉬이 굴러갈 리 만무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김 대표가 백방으로 나섰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2006년 시작한 프로젝트는 정부가 바뀌면서 결국 2009년 좌초하고 말았다. 김 대표는 그동안 개발한 기술을 사장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한국에 독자적인 회사를 세우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MMPC다.

    “저는 엔지니어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어느새 환갑이 됐지만 나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동안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퍼포먼스가 더 잘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의 말처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IBM 등 세계적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조직문화를 보면 나이 많은 엔지니어들이 나이와 관계없이 일하고 뛰어난 성과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의 정년퇴직 문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 대표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청년들보다 내 실적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라며 “이 분야에서 계속 일해왔기 때문에 정보나 인맥, 그리고 깊이 있는 지식 측면에서 나를 따라올 만한 경쟁 그룹이 나오기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저는 제가 연구해온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거기다 그동안의 경험과 네트워크(인맥)를 더해 새로운 제품을 많이 만들고 있어요. 우리 회사의 초저조도 카메라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물체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어요. 보안 분야에 꼭 필요한 핵심 기술이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 대한민국이 고민하는 차세대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제 목표입니다.”

    김 대표는 지금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풍토에 대해 우려의 말도 쏟아냈다.ㅤ

    “예전에는 밤을 세워가면서 사명감과 성취감을 갖고 연구개발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문서를 멋있게 쓰고 그것으로 연구개발비를 타내는 것에 더 몰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이런 환경에서도 김 대표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그의 관심은 가장 첨단 시장에 쏠려 있다.

    “입는 컴퓨터, 달리 말해 웨어러블 디바이스 개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화면도, 극장 스크린도 필요 없게 만드는 새로운 개념의 기기 말이에요. 이런 새로운 플랫폼 개발을 통해서 저는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산업적 도약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그리고 엔지니어의 최고 행복인 연구개발을 평생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면 사회 뒷전으로 밀려나 자녀나 손주만 바라보며 지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김 대표는 새로운 롤모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가 새로운 도전에서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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