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2000.11.16

“무기와 쌀 사주고 전두환 미국에 갔다”

새 정권 취약점 해결 ‘정권 유지비’ 풀어…워싱턴 도착 전날 추가 쌀 도입 검토

  • 입력2005-05-27 1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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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와 쌀 사주고 전두환 미국에 갔다”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국내 언론에 발표된 날짜는 방미 닷새 전인 1월23일이었다. 같은 날 김대중씨에 대한 감형이 있었고, 이튿날인 24일에는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겉보기에는 국내 정세가 안정되어 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밑바닥 민심은 여전히 집권 세력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다. 정치권은 새 집권층의 위세 앞에 숨을 죽였고,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에는 힘이 실리지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방미를 위해 서울을 떠난 사흘 후 집권세력은 김대중씨를 비롯한 이문영 문익환 고은 씨 등 15명을 전국 교도소에 분산 수용했다.

    한달여 전인 12월12일 터져나온 광주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은, 미국과 전두환 정권의 밀월에 대한 반감의 상징적인 표출이었다. 광주사태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았던 때다.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했다.

    국내 경제 상황이라고 좋을 리가 없었다. 1980년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5.7%였다. 한미 관계 역시 소원해질 대로 소원해져 있었다. 특히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군부와의 관계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워싱턴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을 맞을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시각에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레이건-전두환 회담에 대비한 다섯 장짜리 최종 보고서를 올렸다. 1981년 1월29일자의 이 국무부 문서는 2급 비밀(Secret)로 분류되어 있던 것으로 1996년 7월26일에 비밀 해제된 것이다.



    이 비망록에서 헤이그 장관은 한국 국민이 보는 전두환 정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지난해 5월 광주 폭동의 여파에 짓눌려 있는 한국 국민은 전두환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유예 기간(grace period)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임.’

    전두환의 방미 목적, 전두환이 특히 원하는 점, 미국의 목적, 방미 배경 및 다루어질 현안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문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전두환 대통령의 사람 됨됨이와 정치 행위의 특징을 나열한 대목이다. 개인에 대한 평가이자,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을 보는 시각이 어떤 것인지가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에 덧붙이는 설명이나 내용의 가감 없이 문서 그대로 옮긴다.

    ‘전쟁 이후 한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전대통령은 확고한 권력을 구축했고, 정치를 안정적으로 복원시켰음. 그는 민주주의의 형태를 유지하는 한편, 전임자인 박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유교에 바탕한 권위주의자로 행동하고 있음. 군부의 지지를 누리고 있으며, 관료와 기업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음.

    그는 최근 계엄령을 해제했으며, 2월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될 것으로 보이며, 협조적인 국회 구성을 위해 현역 대통령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활용할 것임. 대부분의 한국민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이 유예기에 극도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지와 독재 스타일(strongman-style)의 정부가 새로운 내부 동요를 야기하지 않고 보다 더 긍정적인 지지를 확보할 만큼 완화된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시험해보려는 입장임.

    후자의 경우 이는 기본적으로 내정의 문제이긴 하나, 한국 군부 내의 핵심 인사는 물론 기업가와 일부 주류층 인사들도 우리가 정치 안정을 위해 조용하지만 확고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음.

    전두환은 국가 지도자가 되는 먼 길을 아주 단시일에 올라왔음. 1979년 12월까지만 해도 군부 내에서 대단히 주목받는 다소 공세적인 인물이었으며, 안보 분야 외에는 국가 정부 차원의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거의 경험이 없이 정치 권력을 차지했음.

    그는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으며, 지식에서 많은 결함이 있음. 그러나 그는 지식 습득이 매우 빠르며, 일부 소장파 군인들보다는 독선적인 면이 덜하고 융통성도 있는 편임.

    그는 또한 한국의 내부 발전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우리가 개인적인 권고를 해주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음. 김대중 문제에 대한 외국의 우려를 그가 수용할 능력이 있는지, 또는 그럴 의지가 있는지가 그가 얼마나 원숙한지를(matured)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임.’

    헤이그 국무장관은 한미간 현안을 다섯 가지로 압축해 놓았다. 첫번째가 한미 관계 정상화 및 한국의 정치 발전이었다.

    ‘한국 내에는 동맹간의 오랜 긴장 상태가 종식되리라는 점에서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가 있음. 내부적으로는 전두환 대통령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시각도 일부 있으나, 이번 방미가 성공을 거둘 경우 안정세 회복에 기여하게 될 것임.’

    한국 대통령의 미국행에 빠지지 않는 현안 두 가지는 안보와 경제다. 전두환 대통령의 1981년 방미에도 이 두 가지 현안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의제였다. 특히 안보 문제의 경우, 전임 카터 대통령의 미군 철수 정책이 비록 원래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했으나, 그 파장은 적지 않았다.

    ‘안보 확약과 미군 철수:1979년 중반 미 지상군 철수 계획이 유보된 것은 1970년대에 걸쳐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이 한반도의 군사 불균형을 야기했다는 뒤늦은 인식에서 이루어진 것임. 한국군 증강 계획이 점차 그 격차를 메우긴 했으나, 한반도에서 안정적이고 자생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함.

    한국의 안보 노력 지원:한국은 자위 능력 향상을 위한 조치를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음. 방위산업 개발에 착수했고 오래 전부터 구입을 요청해온 F-16 전투기를 포함해 주요한 미국산 군수품 획득 계획을 세워놓고 있음.’

    한국군 증강 계획이라는 것은 미국산 무기 구입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표현이 한국군 증강 계획이었을 뿐 ‘미국 무기 구입 계획’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979년 한국이 미국의 해외군사판매(FMS) 신용으로 사들인 미국산 무기가 2억7500만 달러어치였던 데 비해, 1980년에는 1억6000만 달러로 뚝 떨어져 있었다. FMS 신용을 증액시키는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과제 중 하나였고, 미국이 전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선물 보따리도 이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경제였다. 1980년도 곡물 수확도 형편이 없었다. 한국의 경제 사정을 제 집안살림 들여다보듯이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미국은 전대통령이 무엇을 요구해올 것인지도 미리 짚어놓고 있었다.

    ‘한국은 미국이 잉여 지원을 늘려줄 것과 무역 할당에서 미국이 좀더 자유로운 입장을 취해 제한 조치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할 것임. 한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안,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밝혀주어야 함. 한국은 미국이 보조금으로 일본산 쌀을 구입하는 것을 허락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그 대가로 100만 톤 이상의 미국산 쌀을 구입했음.’

    미국산 쌀 구입도 전대통령의 방미를 성사시킨 뒷거래 가운데 하나였다.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아마코스트가 헤이그 국무장관에게 제출한 2월6일자 조치 각서에도 이 쌀 문제가 거론되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에 따른 후속 조치들’이라는 제목의 문서(2급 비밀)다.

    ‘한국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이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날 밤, 추가로 쌀을 도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음. 이 쌀 추가 구입이 성사될 경우 지난 가을 한국이 약속했던 미국산 쌀 구매 이상의 효과를 충족하게 됨. 지난 가을, 한국은 거액의 보조금이 부과된 일본 쌀 100만 톤의 구입을 추진하면서 우리의 승인을 요청했음.’

    한미간의 이런 식의 농산물 뒷거래는 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 주는 소액의 PL-480 금융 지원을 받는 대가로 사실상 미국에 소맥과 옥수수의 전매권을 주고 있었다. 한국이 미국산만 사들였던 것이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를 성사시킨 것은 김대중씨 감형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산 무기와 쌀 구입이라는 대가도 있었다. 정권 유지비인 셈이었으며, 기반이 취약한 새 정권의 이 정권 유지비가 어떻게 미국에 흘러들어갔는지를 미 국무부 비밀문서들이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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