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안 블루
고양이가 새벽부터 반복적으로 울어댄다야옹야옹야옹지상을 뜨고 싶은 모음들의 강반복적으로 울어야만그리움의 끝에 가 닿을 수 있다는 명제가고양이 울음에서 성립한다어느 날 한식구가 된 진회색 러시안 블루처음엔 러시아 이름 미하일로비치의 애…
20130415 2013년 04월 12일 -
봄날은 간다
고즈넉한 산사山寺암자 툇마루에 쏟아지는 햇살 아래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자승童子僧어디선가 산꿩이 울면잠자던 계절은 기지개를 켜고산천은 온통 초록으로 치장하는데푸른 하늘엔신선神仙의 하품 같은 두둥실 구름 한 점임이여!봄날은 그렇게 가더…
20130408 2013년 04월 05일 -
일곱 살 적 인연
저수지 둑방 길을 달리다가 꽈리를 틀고 앉아 있던 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만 달리던 힘으로 콱! 밟고 나는 미끄러져 넘어졌지요. 맨발로 뱀을 밟던 순간, 물컹하고 미끄러지던 그 감촉이 아직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용이 되어 …
20130401 2013년 03월 29일 -
청춘계급
우리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를 들었다우리는 피터 폴 앤 메리의 를 들었다우리는 폴 버터필드의 를 들었다누가 노래하는가?청춘계급!청춘은 참전용사에게 훈장이다. 하늘과 하늘을 이어주던 무지개다. 듣는 세대가 보는 세대를 위하여 노래한다.…
20130325 2013년 03월 22일 -
비정한 길
길에 진액을 다 빼앗긴 저 바싹 마른 노인길이 노인을 밀어내는지 노인은 걷지도 못하고 길 위에서 촘촘 튄다어찌 보면 몸을 흔들며 자신의 몸속에 든 길을 길 위에 털어놓는 것 같다자신이 걸어온 길인, 몸의 발자국 숨을 멈추고서야 자신…
20130318 2013년 03월 15일 -
3월
이제는 달라져야겠다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방에 화분을 새로 들여놓는다 이제는 달라져야겠다겨울이 대문 열고 나가자 바람이 따라 나가네 에이 문 좀 닫고 나가지그래도 달라져야겠다3월엔 뭔가 달라져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20130311 2013년 03월 08일 -
반성 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못으로 긁힌 듯한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징그러워서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그리하여 주主는나를 놓아주신다.여행을 하고 돌아와 반신욕을 하면서 우…
20130304 2013년 03월 04일 -
獨樂堂
獨樂堂 對月樓(독락당 대월루)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만약 내려오는 길이 없다면, 세상 어딘들 올라갈 수 있을까. 정상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20130225 2013년 02월 22일 -
화살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쏜살같이 급강하한다세계가 적요하다우듬지와 뿌리 간 거리가 온 우주의 거리다. 화살이 날아가는 수평 공간을 수직으로 …
20130218 2013년 02월 15일 -
수덕사 거문고 한 채
백반 가루 붉은색 주머니 하나 기저귀처럼 사타구니에 차고 있는 옹골찬 오동나무 수덕사(修德寺) 거문고 한 채 아직도 싱싱하다 아직도 상하지 않고 울고 앉았다 그때 그대로다 눈길 헤치고 그 밤에 보러 간 고려 공민왕의 거문고 다정불심…
20130204 2013년 02월 01일 -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너의 어미를 만나라어미가 누워 있다 오래 전부터 앓아왔다무슨 병인가 묻지 말고 어미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라어미의 熱이 너의 이마에 오를 때까지기다려라, 뜨거운 어미의 熱이 너의 가슴을 태울 때까지나는 하루에도 몇 …
20130128 2013년 01월 25일 -
외박(外泊)
좀 더 쉬었다 갈게요. 하느님!늦게 핀 들꽃도 꽃이잖아요.골목 안,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핀이 개망초꽃 두고 갈까요?저 분도 바르지 않은 눈물 보이지 않으세요?전 이 골목 안, 저 오래된 국숫집 담 밑에 핀어머니 살아 돌아오신 …
20130121 2013년 01월 18일 -
이삿짐
이삿짐은모든 이삿짐은도무지 거룩하기만 해서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다. 뭔가 꽉 차 있어 마음 디딜 틈이 없는 시다. 허공에 마른 붓으로 적어놓은 것 같은 투명한 느낌의 문장. 몇 번 이삿짐을 싸고 풀고 하면 휙 지나가는 인생살이. 내…
20130114 2013년 01월 11일 -
칼치
아버지의 이름은 칼치였습니다고향에서는 가장 키가 컸던안강망 고깃배를 타던 뱃사람사람들은 아버지를 칼치라고 불렀습니다나는 어부의 아들이었지만아버지는 공장노동자가 되길 바랐습니다마포자루를 깎는 제재소에취직을 하라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얘…
20130107 2013년 01월 07일 -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
20121231 2012년 12월 31일 -
아주 행복해 보이죠?
아주 행복해 보이죠? 신대철이 상점엔 사람이 만든 것 일색이군요.그럼, 저건 어떠신지? 폭발적 인기죠.아주 예쁘게 웃는데요? 인형이군요.아주 행복해 보이죠?조그맣고, 사람 맘에 들게 웃고, 눈물도 없고……21세기에는 사람이 인형의 …
20121224 2012년 12월 21일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
20121217 2012년 12월 14일 -
사랑법
사랑법 강은교떠나고 싶은 자떠나게 하고잠들고 싶은 자잠들게 하고그리고도 남은 시간은침묵할 것,또는 꽃에 대하여또는 하늘에 대하여또는 무덤에 대하여서둘지 말 것침묵할 것.그대 살 속의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쉽게 …
20121210 2012년 12월 07일 -
철근콘크리트 벽
철근콘크리트 벽 김주대벽은소처럼 서서 빗속에 붉게 운다안을 지키기 위해밖을 견뎠을 것이다눈물의 안은 무사하다안을 지킨다는 것, 집 안에 누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개나 소처럼 짖고 울면서 지키는 거다. 시인은 눈물의 안을 본다. 여…
20121203 2012년 11월 30일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에밀리 디킨슨/ 강은교 옮김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사랑을 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산과 하늘, 강…
20121126 2012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