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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닦는 나무
은행나무를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당신이라는 별을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아름답게 지고 싶은데이런 …
20130916 2013년 09월 13일 -
명함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돌의 명함은 침묵이다꽃의 명함은 빛깔이다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명함이 없어서 여러 사람에게 결례를 하곤 한다. 명함 대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려 하니 다들 웃…
20130909 2013년 09월 06일 -
살다가 보면
살다가 보면넘어지지 않을 곳에서넘어질 때가 있다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살다가 보면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떠나보낼 때가 있다떠나보내지 않을 것을떠나보내…
20130902 2013년 08월 30일 -
지상에 없는 잠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외로울 필요가 있었네우주에 가득 찬비를 맞으며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저물녘 마른…
20130819 2013년 08월 16일 -
전당포는 항구다
방세 두어 달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데죽을 땐 죽더라도 삼겹살 몇 덩이 씹어보고 싶어서전당포 간다육질이 쫄깃했던 내 젊음은 일회용 반창고처럼 접착력이 떨어져오늘 하루 버티는 일에도 힘껏 목숨을 건다언제나 돈 떨어지면 공…
20130812 2013년 08월 09일 -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절 마당을 쓴다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빗자루에 쓸려 나간다산에 걸린 달도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쓸면 쓸수록 별이 더…
20130805 2013년 08월 02일 -
저녁의 감촉
노인(老人)이 공원에 앉아 호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어두워지자손을 더 깊이 넣어 무언가를 찾습니다꺼내는가 싶더니 다시 넣어만지작만지작합니다바람이 숲을 뒤적거리자 새가 날아갔습니다새가 떨구고 간 깃털들 땅거미에 곱게 싸서바람은 숲의 호주…
20130729 2013년 07월 29일 -
시
별 없이 캄캄한 밤유성검처럼 광막한 어둠의 귀를 찢고 가는 부싯돌이다 2행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는 단 한 줄의 힘으로 섬광처럼 떠오르는 순간을 보여준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하루’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 시를 읽고 그것은 한…
20130722 2013년 07월 22일 -
등명(燈明)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심지의 힘으로 맑아져작은 등명이 되고 싶었다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등명리에 밤이 오고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 그늘이어…
20130715 2013년 07월 12일 -
창문
창문을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창문을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지금까…
20130708 2013년 07월 05일 -
당신 눈동자 속엔
당신 눈동자 속엔내가 떠나야 될나의 바다가 있다들여다볼수록 깊어진다들여다볼수록 넓어진다푸르르 꿈꾸는 바닷물결밀고 써는 부대낌들하얗게 재우는 모진 바람 속을갈매기 한 마리날고 있다당신 눈동자 속엔내가 건너야 될나의 수평선이 또 하나어…
20130701 2013년 06월 28일 -
산벚나무가 지켜보다
그때, 한 벚꽃이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날아갔다네가 그토록 애달프게 품어온 그리움이 어쩌면 幻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너는 산길에 주저앉고 말았다떨어진 꽃잎들이 나뭇잎 위에서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네 애달픔도 …
20130624 2013년 06월 21일 -
그리움
오래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그만큼 넓은 바다와 하늘이 우리 사이에서 출렁여왔다물결이 밀어오고 바람이 실어오는 기억의 누더기들을 주워한 조각 한 조각 꿰매고 또 꿰매면서 다시 만드는 기억 속에서도너의 모습은 변화하고 있…
20130617 2013년 06월 14일 -
樂貧(낙빈)
만질 수 있는 가난이 좋다.빗방울과 산사나무 열매의 붉은빛으로빚은 가난,불가피하게 당신이 가난이라면내가 빈 쌀독의 안쪽에 고요히 들어앉은공허라도 좋다.묵은 울음들을 쟁인 몸의 가난과허리에 흉터가 되어버린 가난에 대해서는할 말이 없다…
20130610 2013년 06월 07일 -
꽃밥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
20130603 2013년 05월 31일 -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얼마나 또 오래 딴생각을 …
20130520 2013년 05월 20일 -
흰올빼미
흰올빼미는 눈올빼미 또는 북극올빼미라고도 불린다. 머리를 270도가량 돌릴 수 있는데 머리가 잘 안 돌아갈 때 나는 이 올빼미를 생각하곤 한다. 북극의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며 날아다니는 백야의 유령 같은 새, 눈 오는 날 당신도 눈…
20130513 2013년 05월 10일 -
길 위에 인생
여기야 여기이쯤잠시 쉬었다 가자춘설 난분분한데천수만 상공 붐비는저, 철새 떼시동 끈 배 되어일렁이는 물살에 기대이 한밤누가 여독을 푸는가신천지 찾아 떠도는길 위에 인생내 밟고 온 삶 바라보는 요즘 ‘여기가 어디지’라며 걸어온 길을 …
20130506 2013년 05월 03일 -
유랑
나, 걸었지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길은 멀고도 먼 바다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뒤를 돌아보았지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었지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되…
20130429 2013년 04월 29일 -
일상사
가슴뼈를 빠갠다 심장을 멈춘다 펌프로 피를 강제 순환시킨다 대동맥을 자른다 인공 혈관으로 끼운다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무서움으로 수술 이전에 나는 이미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수술실에는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10여 명의 젊은 간호사들이…
20130422 2013년 0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