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 들려온 모르는 여자 노래
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노래방에서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화장실에 갔다 오다 들은모르는 노래반주가 끝나고도 한 번 더불렸다우리 방에 들어와한 번 불러보았으나(오래전에 들은 것 같았지만)왠지모르는 노래사람들은 그게무슨 노래냐고 물었지…
20120213 2012년 02월 13일 -
백지로 뛰어들던 날, 그 막막함
그날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따스한 모래 …
20120130 2012년 01월 30일 -
서울, 이방인에 더 시린 겨울
아임 스트레인지 히어먼저 강을 제대로 건너는 일부터 시작해이토록 거대한 이정표를 본 적이 없지입이 벌어졌고 오누이는아직 훈련이 덜 된 것 같다영어 학원에 다녀야겠어, 동생은 부드러운 사투리로말했고 그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어투오누이는…
20120109 2012년 01월 09일 -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
모른다꽃들이 지는 것은안 보는 편이 좋다궁둥이에 꽃가루를 묻힌나비들의 노고가 다했으므로외로운 것이 나비임을알 필요는 없으므로하늘에서 비가 오면돌들도 운다꽃잎이 진다고시끄럽게 운다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대화의 너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외…
20111226 2011년 12월 26일 -
정정한 거목 할아버지가 쓰러졌다
작아지는 몸당신 곁에 앉아 당신을 보는 것은작아지는 몸을 수수방관하는 일당신을 어루만져 작게 만들고 있는투명한 손 곁에서의 속수무책 당신은 작아지고 쭈글쭈글해지고샘처럼 어두워지고 당신이 산그늘에 누워 춥고 먼 골짜기들을 그리워할 때…
20111212 2011년 12월 12일 -
엄마 생각하면 한없이 짠해집니다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소녀가 미소를 짜고 있다소녀가 하품을 짜고 있다레이스가 길어지고 있다그 누구도 원치 않는 무가당 소녀가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쓱쓱 써나가는 것처럼레이스를 짜고 있다가슴이 미어지고 있다고시원에서…
20111128 2011년 11월 28일 -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 동물이다
동지(冬蜘)밤이고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아이들이 가슴팍에…
20111114 2011년 11월 14일 -
콜! 콜! 生을 펄떡이게 하는 마법의 주문
콜!콜!예컨대미용실 옆자리에 앉은 여대생이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예컨대택시를 타고 남가좌동 명지대를 가는데서울 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예컨대베이징 올림픽 남자 핸드볼 경기에서 해설자가조치효 선…
20111031 2011년 10월 31일 -
기념일 / 기념에는 기대와 ‘희망’이 있다
기념일식도에서 소장까지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위를 기념하고쓸개를 기념하고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전쟁이 있었던 날,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어제…
20111017 2011년 10월 17일 -
‘줄넘기’, 연습을 한 사람만이 솟구친다
줄넘기줄넘기를 하고 있다.지면을 넘기며지면 위에 선다.발아래 지면이 팽창될수록망각이 깊어져다른 페이지 속으로 섞여 들어간 거짓말들처럼 두 발은 부드럽게 흩어질 뿐들러붙은 손하나 둘 셋 심장을 후려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지금 …
20111004 2011년 10월 04일 -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고양이 한 마리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다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코끼리 같은 버스가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 있다누군가 말한다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누군가 답한다종점에서 바퀴는…
20110919 2011년 09월 19일 -
내게도 풋사랑 K가 있었다
Absolute K (1966.2.16~2008.6.9) 마침내 우리는 편지에서 뛰쳐나와맨몸의 영혼으로 만났습니다하마터면 따라 웃을 뻔했어요 하지만미소 뒤에 병풍 뒤에 첫사랑의 주검을 두고고깃국을 먹는 건 어쩐지 으스스한 일뜨거운 …
20110905 2011년 09월 05일 -
카프카 독서실
카프카 독서실벽이다.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그 껍질을 깨고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비벼 대고 싶었다.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쿵, 말문이 열리면 긴…
20110816 2011년 08월 16일 -
중얼거리는 나무
중얼거리는 나무빅토르 최는 화부였지빅토르 최는 화부였지만 노래를 불렀어빅토르 최는 화부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는 시였어우리는 모두 노래들인지도 몰라노래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나무는 가수였지나무는 가수였지만 노래를…
20110801 2011년 08월 01일 -
유희경의 ‘珉’
유희경의 ‘珉’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
20110718 2011년 07월 18일 -
보고 싶은 친구에게
보고 싶은 친구에게열두 살에 죽은 친구의 글씨체로 편지를 쓴다.안녕, 친구. 나는 아직도 사람의 모습으로 밥을 먹고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한다.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냉동실에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으로 웃는…
20110613 2011년 06월 13일 -
양치기 소년처럼 글쓰기 중독
청춘마감은 없습니다.종종 쫓기는 기분으로 시를 씁니다.쫓아오는 자는 내 발에 걸려넘어지거나 자주 부어서 울었지요.그게 내 눈망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죽은 눈을 빼서 그에게 보여주면건너편 창문에서 냉큼 물어가곤 합니다.전에는 …
20110530 2011년 05월 30일 -
달콤한 외할머니네
외가솜사탕 기계에서 설탕 실이 풀어져 나무 막대에 모이듯손주, 증손주들이 외할머니 집 툇마루에 모인다.‘달리아’와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성한 계절.‘토실’, ‘토돌’이란 이름의 붉은 눈 흰토끼들이 함께한 가족 캠프에가겟집에서 …
20110516 2011년 05월 16일 -
허연의 ‘박수 소리’
박수소리 귀가 웅웅거리니까 세상은 똑같은 소리만 낸다. 에밀레종이다. 어쨌든 그게 수술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난 그래도 중환자 넘쳐 나는 백 년 된 이 병원에선 귀여운 환자다. 구원을 기다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술은 너무하다. …
20110418 2011년 04월 18일 -
김행숙의 ‘착한 개’
착한 개 한 마리처럼 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는 사람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그들의 고독한 손가락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공중에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서…
20110404 2011년 04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