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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하임 끝끝내 ‘나치 모르쇠’

2차 대전 당시 나치 복무 평생 수많은 논란 과거 청산 없이 역사 무대로 퇴장

  • 빈=임수영 통신원 hofgartel@hanmail.net

발트하임 끝끝내 ‘나치 모르쇠’

발트하임 끝끝내 ‘나치 모르쇠’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던 1979년 당시의 쿠르드 발트하임.

독일 베를린에서 한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나치였어요?” “당연히 그랬지.” 뮌헨에 사는 다른 가정의 손자가 묻는다. “할아버지도 나치였어요?” “그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오스트리아 빈의 어느 가정에서 같은 질문을 하면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나는 절대로 아닌데, 옆집 할아버지는 나치였어.”

누구보다 열렬히 나치에 동조했지만 패전 후 나치였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오스트리아의 과거청산 현실을 빗댄 유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처럼 분단될 위기에 놓인 오스트리아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연합군을 설득해 간신히 나라의 독립과 중립을 인정받았다.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첫 번째 희생자’라는 논리를 쓴 덕분이다.

이후 동서 냉전체제로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척결’을 제1 목표로 삼은 미국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상당수 거물급 나치는 미 중앙정보국(CIA)에 영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의 전쟁 책임 논란은 유야무야되면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됐다. ‘우리는 희생자’라는 전 국민적 최면은 그로부터 40여 년 후 ‘발트하임 사건’이 터지기까지 끈질기게 지속됐다.

유엔 사무총장과 대통령 역임

6월14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한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 1918~2007)은 유엔 사무총장(1972~1981)을 역임한,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이다. 종전 직전 빈국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발트하임은 전쟁이 끝난 후 외무부에 입성해 외무장관 비서, 캐나다 대사, 유엔 대사, 외무장관 등 초고속 승진을 했다. 유엔 사무총장 시절 그는 조용하지만 예방적인 외교방식으로 특히 중동지역 갈등을 잘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기대했던 사무총장 3선 도전이 좌절하자 빈으로 돌아왔고, 1986년 국민당 공천으로 대선후보로 나섰다.



선거전이 치열하던 그해 3월, 빈과 뉴욕에서 동시에 발트하임이 나치 전력을 숨겼다는 폭로기사가 게재됐다. 오스트리아 국가문서국에서 그가 나치당(NSDAP)과 나치돌격기마대원(SA)이었다는 서류와 사진이 발견된 것이다.

사건은 더욱 커졌다. 며칠 후 국제유대인협회(WJC)는 발트하임이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4만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사업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고 주장했다. 또 발칸에서는 빨치산 퇴치전에서 정보장교로 일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발트하임은 “나는 나치가 아니다. 전범 행위를 한 적도 없다. 맹세하건대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모르쇠’를 되풀이했다. 증거를 들이대도 발뺌만 하는 발트하임에게 화가 난 당시 지노바츠(F. Sinowatz) 사민당 총리는 나치기마대 출신인 그를 빗대 “그래, 좋다. 발트하임이 아니라 그가 타던 말만 나치였다고 믿어주겠다”고 비웃었고, 이후 발트하임의 반대파는 나치군 모자를 쓴 목마를 선거유세에 데리고 다녔다.

보통 유럽에서 나치 전력은 정치적 무덤을 뜻한다. 그러나 발트하임이 대선후보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반대자들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발트하임에 대한 흑색선전은 하루하루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심지어 발트하임이 죽은 유대인들의 금니를 뽑아갔다는 등 괴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오스트리아 국민은 객관적인 증거에조차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더구나 WJC가 “나치 출신의 거짓말쟁이가 오스트리아를 대표할 수 있느냐”며 내정간섭의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하자 오스트리아 여론은 돌변했다. 흑색선전의 배후에 유대인이 숨어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발트하임은 유엔 사무총장 시절 아랍계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 밖에 났다. 그의 주도로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자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복수의 칼을 갈았다는 소문이 설득력을 더해갔다. 전통적으로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한 오스트리아 국민은 ‘그렇다면 더 밀어주자’고 반응했고, 결국 발트하임은 약 54%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러나 대가는 처참했다. 발트하임이 대통령에 당선한 이듬해 미국은 발트하임을 요주의 대상자(Watchlist)에 올려 그는 평생 미국 입국이 거부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느라 서방세계 어느 나라도 발트하임을 예방하지도 초청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제적인 왕따가 된 것이다. 평생의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말년에 조국에 봉사하려 한 전직 전문외교관으로서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음이 분명하다. 발트하임은 1992년 재선을 포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발트하임 끝끝내 ‘나치 모르쇠’

국제유대인협회가 공개한 1943년 5월의 사진으로 가운데가 나치 시절의 발트하임이다.

국제적 왕따 신세 참기 힘든 모욕

1988년 국제역사학회는 “발트하임이 전범 행위를 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렸으나 동시에 “그는 발칸에서 벌어진 전범 행위를 알았어야 했다”며 도의적 책임을 물었다. 발트하임은 “나는 그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했으나 그의 비판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의무였느냐”고 응수했다. 그렇다면 나치에 반대하다 총살당한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는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말인가?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에 참석한 뒤 ‘평범한 얼굴을 한 악(惡)’이라고 표현하며 “아이히만이 그저 바보스럽게 위에서 내리는 지시만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600만 유대인을 죽이고 그들의 살가죽으로 등잔 갓을 만든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에게 속았다. 아이히만이 사형당한 뒤 발견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는 지능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고 더 죽이지 못해 안타깝다”고 고백했다.

발트하임의 `모르쇠`가 통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인 학살의 현장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진정으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망은 비극적이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주간동아 2007.07.03 592호 (p58~59)

빈=임수영 통신원 hofgar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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