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5

2006.10.10

먼 길 돌아 찾은 길 ‘영화는 내 운명’

회사원에서 영화감독으로 인생역전 이경미 씨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06-09-26 18: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먼 길 돌아 찾은 길 ‘영화는 내 운명’

    주목받는 여성 감독 이경미 씨는 원래 영화에 문외한이었다.

    2004년 ‘잘 돼가? 무엇이든’이라는 단편영화로 여성영화제,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 미쟝센 단편영화제 등에서 최우수상을 휩쓸어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경미(33) 감독.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는 영화감독을 꿈꾸기는커녕 영화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운명’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와 합작한 해운회사에서 통역과 번역 일을 했는데, 3년 정도 지나니 회의가 들더라고요. 당최 재미가 없었어요. 이 일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했죠. 그래서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다 보니, 다시 ‘내가 뭘 하고 싶나?’로 돌아가더군요.”

    바로 그때 잊었던 꿈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한 이 감독은 원래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당시 연극영화과를 가겠다고 말했다가 집에서 쫓겨날 지경까지 갔다. 성우이자 연극연출가이던 그의 아버지가 딸이 연극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다.

    28살에 하고 싶은 일 저지르고 아버지 설득

    “연극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제가 연극을 한다니까 펄쩍 뛰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엘리트 여성이 돼서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죠. 제가 장녀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연극영화과도, 연극도 포기했어요.”



    이 감독은 아버지의 뜻대로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에 입학했고, 얌전히 공부만 했다. 그리고 졸업 후엔 곧바로 회사에 취직해 평범한 직장여성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다시 못 이룬 옛 꿈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우연히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이란 곳을 알게 됐다.

    “직장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도 한정돼 있고 생활이 팍팍해 인터넷 영화동호회에 가입했어요. 1999년 여름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 회원이 영상원이라는 곳에 원서를 낸다더군요. 그때까지 영상원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날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종합예술학교라는 곳에 영상원도 있고 연극원도 있더라고요. 저는 당연히 연극원에 관심이 갔죠. 하지만 실기시험에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영상원은 필기만 본다는 거예요. 영상원에 들어가서도 연기는 할 수 있겠다 싶어 일단 영상원에 원서를 넣었어요.”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던 그에게 음대를 졸업한 뒤 음악치료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친척 언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미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저질러. 그리고 수습해.” 이 감독은 원서를 내면서 그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일을 저질렀고, 생각지도 않게 ‘덜컥’ 붙어버렸다.

    “모든 것이 재미있어 ‘살맛’… 사람 이야기 계속”

    살면서 그는 자신이 운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항상 노력한 것의 반밖에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상원은 달랐다. 마침 시험기간도 여름휴가와 일치했고, 시험을 보러 가는 도중 지하철에서 우연히 읽은 잡지 내용이 그날 시험문제로 나왔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운이 맞으니 이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 길 돌아 찾은 길 ‘영화는 내 운명’

    이경미 감독은 첫 장면 데뷔작을 준비 중이다.

    “그 운명을 믿고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처음부터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요. 아버지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끌고 가면 안 좋을 것 같았던지 포기하는 심정으로 허락해주셨죠.”

    막상 아버지에게 거짓말까지 해서 허락을 받아내긴 했지만, 그는 두려웠다. 영화가 자신과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적성에 맞는다손 치더라도, 영상원을 졸업하면 그의 나이 서른둘인데 보장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앞길이 막막했다. 게다가 영상원 동기들에 비해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없다는 열등의식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자신이 결정한 일인 만큼 꼭 그 끝을 보고 싶었다. 끝도 안 보고 포기한다는 건 너무 억울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학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노숙자처럼 살았다. 그런데 다행히 영화가 그에게 잘 맞았다. 특히 자신이 느끼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일에 희열을 느꼈다.

    “시나리오 쓰고, 카메라로 찍고, 편집하고 하는 모든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동안 제 안에서 자신을 옭아매고 억압했던 것들이 분출되는 듯했죠. 작품을 만들면서 살풀이를 하는 심정이었다고 할까요. 작품 하나를 끝낼 때마다 가슴에 뭉쳐 있던 덩어리가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어요. 창피한 얘기지만, 어쩔 땐 작품 하나 끝내고 눈물도 흘렸어요. 아무튼 비로소 숨을 쉬고 사는 것 같았어요.”

    그가 안정된 길을 버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유는 ‘재미있게’, 그리고 ‘정말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다. 연극을 포기하고 대학에 들어간 뒤 그는 연극은 물론이고 TV 쇼프로그램도 보지 않았다. 방방 뜨고 신나는 분위기를 보기만 해도 그 안에 잠재돼 있는 것을 억누를 수 없어 그냥 열심히 공부만 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는데, 재미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 적응도 못했고, 대학 1~3학년 때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욕구를 억누르며 살기엔 삶이 무의미했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직장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화 일을 하는 지금은 한마디로 ‘살맛’난다. 이 감독은 현재 박찬욱 감독이 차린 모호필름에서 첫 장편 데뷔작을 준비 중이다. 올해 안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해 내년에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요.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보다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직장인들, 영웅보다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그들이 영화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서로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제 궁극적인 목표죠.”

    이 감독은 ‘잘 돼가? 무엇이든’의 연출 의도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싫다는 감정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고. 그를 만나고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본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고. 앞으로 그가 하는 ‘무엇이든 잘 돼가’길 바란다. 그래야 인생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테니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