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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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한과 아픔 ‘꿈틀꿈틀’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2-12-12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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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한과 아픔  ‘꿈틀꿈틀’

    판화가 오윤. ‘칼노래’, 광목에 목판, 채색, 30×25cm, 1985.‘아라리요’, 광목에 목판, 채색, 45×38cm, 1985(왼쪽부터).

    시퍼런 칼을 휘두르는 상투 튼 사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시골 아낙, 고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여공…. 오윤(1946~1986)의 판화 속 인물들은 모두 ‘슬픔도 힘이 된다’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오윤 특유의 강한 ‘칼맛’이 살아 있는 목판화들.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한(恨)의 힘이다. 이토록 절절한 한을 깎아내고 파냈던 작가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안고 있었을까.

    민중의 한과 아픔  ‘꿈틀꿈틀’

    ‘무제’ 테라코타 , 14×16×50(h)cm, 1970.

    인사동의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리고 있는 ‘오윤 회고전’은 작가 10주기인 1996년에 학고재에서 열렸던 ‘오윤 판화전-칼노래’ 이후 6년 만의 대규모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목판화 외에도 드로잉, 조각 등이 등장했다. 드로잉에서는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한 멕시코 벽화운동과 노동자들의 건강한 모습을 그렸던 레제의 영향도 엿보여 거칠고도 서정적인 오윤 작품의 원류를 짐작케 한다.

    생전의 오윤은 “남에게 보여줄 가치가 없다”며 개인전은 물론 전시도 잘 하지 않으려 했다. 거기다가 민중미술을 폄하하던 80년대의 분위기 때문에 작가의 생활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풀빛출판사에서 김지하의 시집을 비롯해 시집 20여권의 표지화를 오윤에게 부탁했던 것도 그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생활고 끝에 간경화를 얻은 오윤은 85년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연 지 두 달 만에 꼭 마흔의 나이로 요절했다.

    작품 가격으로 작가의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생전에 만원 안팎의 헐값에 팔리던 오윤의 판화들은 현재 경매에서 1000만원을 호가한다. 보통 작가들은 판화를 찍을 때 30번, 50번 하는 식으로 일련번호를 붙인다. 그러나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오윤의 판화에는 한글 ‘오윤’을 문양처럼 형상화한 낙관과 연필로 쓴 제목만 눈에 뜨일 뿐, 일련번호가 없다. 그 때문에 단 한 장만 남은 판화도 있다. 그나마 소장자들이 작품을 내놓지 않아 현재는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다. 닭장의 문으로 쓰이는 등 갖은 모욕과 냉대를 받다 현재는 800억원을 호가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오윤은 ‘한국의 고흐’인가.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드로잉과 조각들이다. 흔히 오윤을 ‘판화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서울대 조소과 출신이다. 70년대 초반에 작가는 경주에서 전돌 공장을 운영하며 조각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그러나 우리은행 동대문 지점 외벽의 테라코타 부조 벽화(1974) 등을 제외하면 남아 있는 조각들은 대개 소품들이다.



    민중의 한과 아픔  ‘꿈틀꿈틀’

    ‘종이에 연필’, 35×25.5cm.

    만년의 오윤은 조각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경기도 벽제에 테라코타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80년대 민중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오윤. 하지만 그는 “작가의 영혼이 아닌, 이념만 담은 그림은 껍질일 뿐이다”라며 그림이 운동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그는 목판화에서 조각으로, 어쩌면 작가 본연의 장르로 손을 막 내밀다 갔다. 시대가 주는 부채감이 조금이라도 적었다면 그는 좀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이 모든 가정이 그저 무의미할 뿐이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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