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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기획|의혹 먹구름 ‘윤태식 게이트’

“사기꾼 장난에 온 세상이 꾸벅”

‘패스21’ 전자서명법 발효 전후 승승장구… 언론까지 나서 ‘귀하신 몸’ 대접

  •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사기꾼 장난에 온 세상이 꾸벅”

“사기꾼 장난에 온 세상이 꾸벅”
지난 12월19일 서울지검 외사부가 ‘수지 김 살해 은폐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수지 김 살해 사건에 대한 수사는 일단락 되고, 수지 김 살해범 윤태식씨(43)가 정관계 인사를 상대로 로비한 ‘윤태식 게이트‘가 본격화하는 느낌이다. 서울지검은 수지 김 사건을 조사해온 외사부가 아니라 특수3부에 ‘윤태식 게이트‘를 배당함으로써, 이를 본격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주지하다시피 윤태식은 1987년 홍콩에서 부인을 살해한 후 북한대사관을 통해 자진 월북하려고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벤처기업의 대표가 돼 정관계 인사를 상대로 로비를 했다니, 많은 사람들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보안 체계가 이렇게 허술한가‘ 하며 한탄하게 될 것이다.

안기부가 살인사건을 은폐해줌으로써 자유인이 된 윤태식은 모 방송사 PD와 결혼 생활을 하며 신용카드 사기범이 되었다. 윤태식은 여복(女福)이 넘치는 사내인데, 그의 주변에는 직장을 가진 여성이 많았다. 그는 직장 여성들로부터 함께 근무하는 회사 남자직원들의 재직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당시만 해도 은행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보지 않고 신용카드를 발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윤태식은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여러 은행을 다니며 재직증명서에 있는 남자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 받았다. 그리고 청구서가 발급되기 전까지 흥청망청 카드를 사용하고 폐기했다. 그런 다음 협조해준 여성과의 관계도 끊어 버렸다. 1992년과 93년 비슷한 수법으로 피해를 본 피해자가 속출하자, 국민카드사를 비롯한 카드회사는 서울지방경찰청 수사팀과 함께 범인 추적을 시작했다.

피해자 주변 수사에 착수한 수사팀은 곧 한 여직원에 의해 피해자의 재직증명서가 발급된 사실을 포착하고 그 여직원을 추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직원은 윤태식과의 연락이 끊어진 다음이라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 때문에 수사는 윤태식과 통하고 있는 여성을 찾을 때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다 수사팀은 윤태식의 연락처를 아는 한 여성을 찾아내 장시간 설득한 다음 협조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여성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카페로 윤태식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사람은 ”윤태식은 여우같은 자였다. 그는 여성들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수사팀이 잠복해 있을까봐 1시간 먼저 약속한 장소에 나와 주변을 살폈다. 카페에서 그를 검거할 때도 그는 1시간 전에 카페 주변에서 드나드는 사람을 체크한 후 카페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윤태식은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의정부 교소도에서 복역했다. 1996년 7월 만기 출소한 그는 가구 판매업을 하는 모 언론사 대표 부인과 가까워졌다. 이 부인이 갖고 있던 건물에 브라콤이라고 하는 지문인식 시스템을 개발하는 벤처기업이 있었는데, 윤태식은 이 회사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집을 살고 판다든지 하는 중요한 거래를 할 때, 사람들은 ‘인감‘(印鑑)을 사용한다. 인감은 나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대주들은 동사무소에 인감을 등록해 놓고 있다. 그러나 사악한 ‘기술자‘들에게 인감 위조는 일도 아니다. 종종 위조 인감을 사용한 사기 사건이 터져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위조가 어려운 새로운 인감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는 지문(指紋)이었다.

“사기꾼 장난에 온 세상이 꾸벅”
지문을 국가가 인증한 기관에 등록해 놓고 전자상거래를 한다면 거래 비용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A씨가 B씨에게 1억원을 보내야 할 경우, A씨는 PC(혹은 노트북) 앞에 앉아 자기 계좌에서 1억원을 꺼내 B씨에게 송금하라고 명령한 후 명령을 내린 자가 A씨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PC에 설치된 지문인식 장치에 지문을 갖다 댄다. A씨의 지문이 정부 인증기관에 등록된 지문과 일치하면 그 즉시 A씨 계좌에서 B씨 계좌로 1억원이 인출된다.

지문을 온라인상에서 인감처럼 사용하는 것을 전자서명(電子書名)이라고 하는데, 전자서명제도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악한 마음을 가진 컴퓨터 도사라면 정부 인증기관에 등록돼 있는 지문 정보를 해킹해, 이 지문 정보(전자서명)를 갖고 지문 주인의 계좌에서 무단으로 돈을 빼낼 수 있다. 따라서 전자서명 제도를 도입하려면 그에 앞서 정부 인증기관에 등록돼 있는 지문과 온라인상으로 이동하는 지문 정보에 대한 해킹을 완벽히 차단하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브라콤이 바로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는 벤처 회사였다. 그러나 브라콤은 IMF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러자 이 회사의 신기술을 눈여겨본 윤태식이 여러 사람을 투자자로 끌어들여 이 회사를 인수해 98년 9월 ‘패스 21‘을 발족시켰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던 만큼 ‘패스 21‘은 곧 업계의 주목을 끌었다. 어깨 너머로 배우긴 했지만 윤태식도 이때는 상당한 컴퓨터 기술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보태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벤처기업 육성에 전력할 때라 ‘패스 21‘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금융회사가 많았다. 1993년 말 그를 카드 사기범으로 검거했던 국민카드사의 엘리트 직원까지도 스톡옵션을 받는 조건으로 ‘패스 21‘로 옮겨갈 정도로 ‘패스 21‘은 벤처업계의 기린아로 성장했다. ‘패스 21‘이 지문인식 보안시스템을 만드는 회사 중에서 기술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나자 국내외 언론들이 앞다퉈 윤태식과 기자회견을 가졌고, 이는 곧 ‘패스 21‘의 주가를 폭등케 하는 역할을 했다.

1999년 7월1일 국회를 통과한 ‘전자서명법‘이 드디어 발효되었다. 이로써 정부는 지문 인증기관을 설립하게 됐고, ‘패스 21‘은 이 기관에 지문인식 프로그램을 공급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이 기관은 ‘패스 21‘이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데이터 베이스를 완성해 개소식을 가졌다. 그러나 윤태식은 떼돈을 벌 수 있는, ‘승천‘(昇天)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수지 김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서울지검은 윤씨가 ‘패스 21‘을 운영하며 20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잡고 윤태식이 이 돈을 전자서명법 작성과 관련해 정치인이나 관계 인사를 상대로 로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사기꾼 출신의 윤태식이 만든 지문인식 보안 솔루션을 우리 사회는 믿어도 좋은 것일까. 그는 또 다른 사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 15년간 살인 사건을 반공 사건으로 감쪽같이 속여온 것처럼, 전자서명법과 ‘패스 21‘이 개발한 기술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주간동아 316호 (p16~17)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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