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4

2000.12.21

야구광 정몽윤, 야구판 떠난 까닭은

  • 입력2005-06-10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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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광 정몽윤, 야구판 떠난 까닭은
    96, 97년 무렵 야구 취재를 하던 사진기자들이 내뱉던 불평 중에 이런 게 있다. “양복 입은 사람이 왜 자꾸 운동장에서 공을 줍고 그러는 거야. 사진 찍는데 불편하게….”

    ‘양복 입은 사람’의 주인공은 바로 정몽윤 대한야구협회장. 지난 97년 2월 취임 이후 정회장은 협회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몸소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공 줍기였다. ‘선수들은 야구에만 열중해야 한다’는 게 회장의 지론이었고, 이를 아는 사진기자들은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다.

    정몽윤 회장의 야구 인연은 72년 청룡기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고 재학 시절 같은 학년 최고 스타였던 모교 윤몽룡 선수의 플레이에 반해 야구장을 따라다닌 게 그 시작이었다. 중앙고 동기이자 전 홍익대 감독 박종회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시락 싸서 야구장 쫓아다니던 친구”라고 하니 그의 야구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년 시절의 꿈은 십수년 만에 구체화됐다. 프로-아마가 분열 양상으로 치닫던 어려운 시절, 노익장 대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혈혈단신으로 입성했다. 비야구인 출신에다, 너무 젊다는 비판과 비아냥거림도 잠시. 특유의 추진력과 열정으로 한가닥 한가닥 올을 뀄다. 애틀랜타 올림픽 꼴찌 참패 이후 4년 만에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획득이라는 쾌거에 도달하기까지, 정회장의 노력을 부인하는 야구인은 거의 없다.

    정회장은 각종 국제대회 상복이 많기로 소문나 있다. 부임 직후 97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9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000년 캐나다 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시드니올림픽 동메달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국제 대회에서 강호들을 꺾고 첫 기쁨을 맛본 때가 바로 97년 이탈리아 대회인데 직접 이탈리아로 함께 이동, 선수들을 독려한 정회장은 ‘의외의’ 준우승을 거둔 뒤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는 지금도 재임 기간 중 가장 기뻤던 때가 바로 이탈리아 네투노 세계대회라고 말한다. 바로 전해인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꼴찌를 기록, 야구계가 풍비박산이 났던 걸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정회장이 ‘국제대회 강호 한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것도 이때다.

    당초 대의원들의 반발로 연임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게 지난 11월17일 사임 발표 후 중론이었지만 정회장은 이점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대의원이 반발하면 설득을 해서라도 할 수는 있었습니다. 다만, 취임 때부터 연임하지 않겠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었고 이를 지킨 것뿐….”

    말은 하지 않지만 내년부터 훨씬 바빠지는 그의 업무 탓도 크게 작용했다. 지난 96년 현대해상화재 대표이사 재직시 터진 위험적립준비금 사고에 대한 징계가 내년 1월 풀리면서 현업으로의 복귀가 정해져 있기 때문. 사실 정회장은 지난 5년간 이 회사의 고문으로 재직해 왔다. 하지만, 이제 명실상부하게 회장 자리에 권토중래(捲土重來)하는 입장에서 새 각오가 남달랐으리라 짐작된다. 모든 것을 꼼꼼히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상 ‘극렬 마니아’에 가까운 야구업무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 그만큼 야구를 사랑했기에 야구를 떠난다는 해석이 나오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과오도 더러 있었지만, 정몽윤이 이끌던 ‘대한야구협회호’는 80점 이상의 성적을 받을 만했다. 그의 빈자리가 유난히 커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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