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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의 진짜 영웅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 [원포인트 시사 레슨]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이 꼭 짚어 말하는 것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중일전쟁의 진짜 영웅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 [원포인트 시사 레슨]

중일전쟁의 진짜 영웅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 [원포인트 시사 레슨]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점을 언제로 봐야 할까. 보통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로 본다. 다분히 유럽 중심적 사고다. 제2차 세계대전을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뤄진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으로 이뤄진 연합국 간 전쟁으로 본다면 그 시점은 달라져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시점을 3개 추축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던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에 따르면 추축국 일본과 연합국 중국 간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을 그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 

최근 번역 출간된 래너 미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중일전쟁’은 이를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중국은 1937년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년 뒤, 미국은 4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2013년 발표한 이 책의 원제는 ‘잊힌 연합국(Forgotten Ally)’. 비밀 해제된 중국과 소련의 기록까지 샅샅이 뒤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승리에 발판을 제공한 중화민국의 역할을 재평가한 이 책은 중일전쟁 승리 주역으로 단 한 사람을 지목한다.


소련만큼 희생 컸던 중국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데이터베이스]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데이터베이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미국의 인명 피해는 각각 49만과 42만 명이었다. 중국의 인명 피해는 1500만~2000만 명으로 소련의 2000만 명에 필적한다. 그런데 왜 그런 중국의 항전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할까. 

한국인은 ‘대장정’ 하면 중국 공산당이 1934~1935년 남부 장시성 징강산에서 서북부 옌안까지 1만2500km를 국민당군의 추적을 물리치고 탈출한 것을 떠올린다. 애초 8만 명이 여기에 참여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7000명밖에 안 됐다. 

중일전쟁 기간 수백만 명의 국민당 지도부와 군대는 물론, 중국 북동부 일대 수천만 명의 피란민이 일본군에 쫓기면서 중부 우한을 거쳐 서남부 쓰촨성 고원지대에 위치한 충칭까지 4000km를 이동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전쟁에 필수적인 군수물자를 생산할 공장 설비, 기계와 더불어 2만5000명의 숙련공까지 데리고 이동했다. 그 피란민 수가 8000만 명 이상이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은 8만 명에 불과하던 홍군의 대장정은 기억하면서 그 1000배가 넘는 국민당의 대장정은 왜 기억하지 못할까.




장제스, 왕징웨이, 마오쩌둥

20세기 중국 지도자 3인방으로 꼽히는 왕징웨이, 마오쩌둥, 장제스(왼쪽부터). [위키피디아]

20세기 중국 지도자 3인방으로 꼽히는 왕징웨이, 마오쩌둥, 장제스(왼쪽부터). [위키피디아]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처럼 홍군(중국 공산당 군대)을 영웅시한 책만 접한 탓에 홍군이 항일투쟁 선봉에 섰고 국민당군은 무능하고 부패해 패전만 거듭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터 교수는 국민당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던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쇠락을 거듭했고, 1911년 신해혁명 후 군벌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중국에 근대화된 서구 기준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오히려 그렇게 무능·부패·분열한 세력을 이끌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에 맞서 8년이나 버틴 게 기적에 가깝다. 

누가 그 기적을 이뤘나. 미터 교수는 20세기 중국 지도자 3인방의 비교를 통해 이에 접근한다. 왕징웨이, 마오쩌둥, 장제스다. 셋 중 선두주자는 중국의 국부 쑨원의 자타공인 후계자 왕징웨이였다. 젊은 날 청 황제의 암살을 기도했고 중년엔 그 자신이 암살 대상이 돼 3발의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은 파란만장한 이력과 ‘중국 3대 미남’으로 불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탁월한 연설 솜씨로도 인기 만점이었다. 하지만 군사력으로 무장한 장제스에게 점점 밀리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일본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면서 ‘천고의 역적’으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발발 당시까지 중국 공산당의 여러 지도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당시 홍군 병력은 3만 명. 전체 중국군 규모가 400만 명이었다는 점에서 조족지혈이었다. 장제스가 대규모 전투를 수없이 치르며 수많은 장성과 병력을 희생시키는 동안 마오쩌둥의 홍군은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2선급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소규모 전투를 간간이 해가며 세력을 키웠다. 1938~1941년 장제스가 있던 충칭은 218회 공습으로 약 1만2000명이 숨진 반면 마오가 있던 옌안은 17차례 공습으로 214명이 죽었다. 그 기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최고 권좌에 앉은 마오쩌둥은 “역량의 70%를 우리를 발전시키는 데 쓰고, 20%는 국민당을 상대하는 데 쓰며, 10%만 항일에 써야 한다”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항일’이라는 염불보다 ‘세력 확장’이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보인 게 누구인가. 

반면 중일전쟁 발발 당시 전시 지도자로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은 장제스는 이런 라이벌들을 이끌고 벅찬 전쟁을 치러야 했다. 특히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기 전까지 국제적 고립무원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상하이와 난징, 우한, 타이얼좡 등에서 비록 패배할지언정 적군에게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히고 아군의 핵심 전력은 끝까지 지키는 지구전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을 통일된 근대 국가로 재편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항일투쟁이 꼭 필요하다는 민족주의적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피로스’ 장제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의 3거두 
왼쪽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왼쪽).

1942~44년 국민당군의 참모총장으로 파견된 조지프 스틸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국립육군박물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의 3거두 왼쪽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왼쪽). 1942~44년 국민당군의 참모총장으로 파견된 조지프 스틸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국립육군박물관]

이런 신념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 이후 현실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을 논하는 자리에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과 함께 중국 장제스가 3거두로 참여하게 됐다. 또 종전과 더불어 중국은 4대 승전국 중 하나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가 됐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에게 저항 한 번 못하던 약소국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미국의 지원은 오히려 독이 됐다. 일본에 앞서 독일 패망에 우선순위를 둔 미국은 독일과 싸우던 소련에겐 1942년 한 해 식량 150만t을 원조한 반면, 일본과 싸우던 중국에겐 2만4000t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또 1942~1945년 미국 무기대여 원조에서 중국의 비중은 0.5~4%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이런 눈곱만 한 원조를 받고 최대 80만 명에 달한 일본군을 중국 대륙에 계속 묶어둬야 했다. 

가장 치명적인 독은 국민당군의 참모총장으로 파견된 조지프 스틸웰 미국 육군 중장이었다. 실전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동양의 패튼’이라도 되는 양 독불장군 행세를 하던 스틸웰은 장제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정예 병력 10만~30만 명을 버마전선에 두 차례나 투입하는 무리한 작전으로 국민당군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그로 인해 1944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최후 총공세(이치고 작전·대륙타통작전)에 나섰을 때 예비 병력을 상실한 국민당군은 75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궤멸했다. 


[그래픽 제공 · 글항아리]

[그래픽 제공 · 글항아리]

옌안에서 웅거하던 마오쩌둥은 이 소식에 환호작약했고 100만 명 넘게 불어난 홍군을 출동시켜 화북지역 장악에 나섰다. 그즈음 만주에 무혈 입성한 소련군의 지원 아래 중국 북부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장제스는 자신이 꿈꾸던 대로 중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너무도 큰 희생을 치러야 했기에 국공내전에선 패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기원전 318~272)는 알렉산더 대왕 이래 최고 군사전략가로 불렸다. 그는 명성에 걸맞게 로마를 침공해 두 차례나 승리했지만 병력 손실이 너무 커 아무런 소득 없이 철수해야 했다. 이후 군사력이 약화된 에페이로스군을 이끌고 다른 전쟁에 나섰다 패배했고, 본인도 목숨을 잃었다. 그로 인해 ‘피로스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나 ‘실속 없는 승리’를 뜻하게 됐다. 

장제스는 20세기의 피로스일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보자. 중일전쟁에서 장제스의 승리는 중국 인민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장제스를 상대로 한 마오쩌둥의 승리도 과연 중국 인민의 승리라 할 수 있을까.






주간동아 2020.05.01 1237호 (p38~4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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