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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이후 100년 만의 불황 예측한 남자 [원포인트 시사레슨]

하지만 자본주의 부활의 예언가로 몰려 처형된 콘드라티예프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대공황 이후 100년 만의 불황 예측한 남자 [원포인트 시사레슨]

니콜라이 콘트라티예프. [위키피디아]

니콜라이 콘트라티예프. [위키피디아]

올해 세계경제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세계 경제성장률 -0.3%)를 겪을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했다. 거의 90년 만에 역대급 불경기를 직면하게 됐다는 소리다. 

미국의 주가 폭락과 실업률은 그 전조 증세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3월 16일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지수가 전날보다 12.93% 하락해 대공황 때 하루 최대 하락률(-12.82%) 기록을 깼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발생 전 4% 수준이던 미국 실업률은 4월 17%대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JP모건은 20%,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은 32%까지 내다봤다. 대공황 직전 3% 수준이던 미국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던 것과 비교하면 소름끼칠 정도로 유사하다.


최장기 경기파동의 발견자

대공황 이후 100년 만의 불황 예측한 남자 [원포인트 시사레슨]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기악화가 대공황 때만큼 장기화할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를 붙일 만하다. 그래도 단기적 충격만큼은 대공황 시절에 필적한다. 그렇게 돌아온 공황의 공포 앞에서 이러한 장기 사이클을 예측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경기가 호황기(여름)→후퇴기(가을)→침체기(겨울)→회복기(봄)의 사이클(파동)을 그린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파동이 얼마 단위로 반복되느냐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이론(異論)이 분분하다. 

경기순환을 최초로 발견한 이는 프랑스 통계학자 클레망 쥐글라(1819~1905)였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영국, 미국의 가격과 이자율, 중앙은행 잔고 등의 시계열 자료를 비교 분석해 7~11년 단위로 경기순환이 일어났음을 1862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쥐글라의 영어식 발음을 딴 ‘주글라 파동’의 발견이었다. 



영국 사업가이자 통계학자인 조지프 키친(1861~1932)은 1923년 그보다 짧은 단기순환을 발견했다. 미국과 영국의 어음 교환액, 도매물가, 이자율 변동 분석을 토대로 대략 40개월(3년 6개월) 주기의 경기순환(키친 파동)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25년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이론이 발표된다. 공산혁명을 계기로 자본주의체제에서 이탈한 소련의 경제학자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45~60년의 장주기 경기순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 그 주인공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에서 스물다섯 나이에 식량공급부 부장관에 기용된 사회주의 경제학자 니콜라이 콘트라티에프(1892~1938)였다.


스탈린은 미워하고 슘페터는 사랑한 사내

조지프 슘페터. [위키피디아]

조지프 슘페터. [위키피디아]

그는 10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으로 며칠 만에 부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레닌 집권기 경기(景氣)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소련의 경제파탄을 막기 위해 신경제정책(NEP)을 입안할 만큼 역량을 인정받은 경제학자였다. 1925년 그가 발표한 ‘주요 경제 파동’이라는 책은 그 명성을 서구권까지 확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1780년대부터 1920년까지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약 50년을 주기로 한 장기 파동 2.5개의 통계적 증거를 제시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대규모 경기침체가 필연적이지만 그것 역시 회복기를 거치면 다시금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의미심장한 연구였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자체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돼야 한다. 3년 6개월짜리 키친 파동이나 10년짜리 주글러 파동은 그런 도도한 흐름 속의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50년 넘는 파동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특히 사회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소련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종말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요, 자본주의 영생불사라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이 레닌 사후 소련 서기장이 된 스탈린이었다. 1928년에는 경공업과 부농 육성에 초점을 맞춘 NEP가 우익소아병적 획책이라는 이유로 콘트라티에프를 숙청했다. 2년 뒤인 1930년에는 반정부 세력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8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다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이 자본주의 멸망으로 이어지지 않고 1934년 경기회복세로 돌아선 것이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콘트라티에프의 존재 자체가 ‘천재적 영도자’의 오점을 선명히 드러내는 불길함의 표상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의 광기가 극으로 치닫던 1938년 모스크바 인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콘트라티에프는 10년형을 추가로 언도받은 당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그런 콘트라티에프를 부활시킨 이는 마르크스 경제학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역동적 생명력을 구원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였다. 슘페터는 콘트라티에프가 숨지고 1년 뒤인 1939년 발표한 ‘경기순환론’에서 키친 파동, 주글러 파동, 콘트라티에프 파동의 ‘3위 일체 이론’에 해당하는 야심 찬 이론을 구축해낸다. 1929년 대공황은 이 3가지 사이클이 동시에 밑바닥을 그리는 순간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슘페터는 3개 파동 가운데 콘트라티에프 파동을 가장 중시했다. 콘트라티에프 자신은 콘트라티에프 파동을 추동하는 원인을 분석하지 못하고 숨졌다. 반면 슘페터는 그 파동의 원인을 산업혁명(1771), 철도·증기기관(1829), 철강·전기(1875), 석유·자동차(1908) 등 경제 전체는 물론, 사회구조까지 변화시킨 기술 혁신에서 찾았다. 이는 경제발전 동력을 노동 착취나 자본의 이득이 아니라 기업가의 혁신(이노베이션)에서 찾았던 자신의 ‘경제발전 이론’(1912)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로 확장한 것이었다.


쿠즈네츠와 비교되는 삶

1971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사이먼 쿠즈네츠 [노벨상 위원회]

1971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사이먼 쿠즈네츠 [노벨상 위원회]

이렇게 슘페터에 의해 재발견된 콘트라티에프 파동은 이후 많은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에서 우파로 몰려 처형됐지만 서방에선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좌파 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기간을 ‘장기 19세기’로 규정한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과 콘트라티에프 파동을 과거와 미래로 확장해 세계체제이론을 구축한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1930~2019)이 대표적이다. 슘페터를 포함해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가 언젠가 종식을 맞게 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관점을 공유했다. 

콘트라티에프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는 끝까지 소련을 택했고 학문적 본분에 충실하게 살다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만일 그가 서방으로 망명했다면? 역사에서 가정법은 금기시되지만 콘트라티에프의 경우엔 그 비교 대상이 존재한다. 

같은 러시아 출신이지만 1922년 미국으로 망명해 슘페터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교수가 된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다. 쿠즈네츠는 1952년 미국의 실질국민총생산 성장률이 20년 내외 주기로 변동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를 ‘쿠즈네츠 파동’이라고 부른다. 또한 경제발전 초기 심화된 불평등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완화된다는 ‘쿠즈네츠 가설’로 개발도상국의 잇따른 공산화(도미노 현상) 차단에 이론적 기여를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주간동아 2020.04.24 1236호 (p30~3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1240

제 1240호

2020.05.22

“정의연이 할머니들 대변한다 생각했던 내가 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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