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9

2000.08.31

노랑머리와 나팔바지

  • 입력2005-10-14 11: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노랑머리와 나팔바지
    요즘은 어디를 가나 노랑머리의 젊은이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어디 노랑머리뿐인가. 빨강 보라 초록… 동화책에서나 봄직한 낯선 모습들이다. 전에는 머리카락 색이 검지 않으면 노랑쟁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집에도 그 유행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일까?

    고 1이 되도록 너무 털털할 정도로 외모에는 신경을 쓰지 않던 아들이, 내게 간곡한 부탁을 해왔다. 여름방학 동안만 노란색으로 꼭 한 번 탈색을 해보고 싶으니, 아버지 허락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내 아들이 노랑머리라. 그것도 고등학생이. 나도 선뜻 내키지 않는데, 고지식한 남편에게는 말하나마나 어림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며칠을 끈질기게 내게 매달린다. 제 아버지한테는 어려운지 입도 열어보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린 함께 외출을 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녀석은 온통 노랑머리를 한 사람들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엄마, 엄마, 저 정도면 어때요. 멋있죠?” “아니, 너무 노랗다. 저∼어 사람 정도면 또 모를까”. 녀석은 얼른 고개를 돌려 내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고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저 정도 갈색으로 하려면 차라리 안 하고 말죠”라고 한다.

    아들의 그 모습에서 난 문득 20여년 전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팔바지가 유행하던 시절, 친구들은 너도나도 나팔바지를 입고 폼을 잡는데 나만 일자바지였다. 나팔바지 한 벌 사달라고 어머니께 수없이 졸랐지만, 학생이 나팔바지 입고 다닐 데가 어디 있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때처럼 어머니가 야속하고 미웠던 적은 없었다. 엄하신 아버지께는 말하나마나 가망 없는 일일 터였다.

    벙어리 냉가슴만 앓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아버지가 슬그머니 뭔가를 건네주셨다. 펼쳐보니 내가 그토록 입고 싶었던 나팔바지였다. 아, 나팔바지. 입어보니 허리가 좀 크긴 했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평상시엔 고지식하고 구두쇠라서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버지가 그날은 세상에서 최고 멋쟁이로 보였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새삼스레 그 일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떠오르며 내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아버지의 또 다른 사랑을 내게 보여주었던 나팔바지.

    안 되겠다. 나도 오늘 밤부터는 남편 설득 작전에 나서봐야겠다. 한번의 탈색으로 검은 머리가 영원히 노랑머리가 되는 것도 아닌데 어떤가. 이 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좀더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문을 좀더 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먼 훗날 내 아들도 어른이 된 뒤 제 아들과 이런 문제로 부닥치게 되면, 제 아버지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짓겠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