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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담쟁이 덩굴과 신혼집

담쟁이 덩굴과 신혼집

담쟁이 덩굴과 신혼집
작은 촌락을 돌아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한 일상이지만, 때로는 바윗돌에 부딪혀 가벼운 포말이 인다. 우산과 교과서까지 잃어버리고 들어오는 수선스런 딸아이를 볼 때, 가계부를 펼칠 때마다 초라한 아내가 될 때, 고여 있는 물처럼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어느 바윗돌 아래 숨죽이고 있을 가재처럼 외로워진다.

그런 날 나는 거실 창가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다. 창 밖으로 길 건너편이 바라다 보이고,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풍경이 있다.

봄이 되면 푸른 담쟁이가 넘실거릴 붉은 벽돌집. 오랜 연애 시절을 마감하고, 남편과 처음으로 둥지를 튼 집이다.

신혼집을 구하러 다닐 때, 그 집에 담박 마음이 이끌린 것은 다름아닌 담쟁이 덩굴 때문이었다. 고만고만하게 지어진 특색 없는 벽돌집 중에서도 그 집만큼은 표정이 있었다. 초가을, 막 단풍빛이 들기 시작하는 담쟁이 덩굴은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새색시의 꿈과 닮아 보였다.

여름날, 담쟁이 덩굴이 푸르게 휘감긴 대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비밀의 화원’ 을 떠올렸다. 신혼집을 들어설 때마다 나는 비밀의 화원에 들어서는 메리처럼 가슴이 설레였다. 줄장미와 백합, 온갖 꽃들이 만발한 메리의 화원같이 내게 주어진 가정이라는 꽃밭을 향기롭게 일구어가고 싶었다.



몇해를 다른 동네에서 살다가, 이태전 신혼집 맞은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집을 떠날 때 10개월이었던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무성한 담쟁이가 너무나 반가웠다. 집 앞을 지나면서 손바닥으로 담쟁이 잎사귀를 가만히 쓸어 보면, 아궁이 앞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일상 속에서 겪는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도를 넘을 때 신혼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속을 흔들던 갖가지 상념들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상상 속에서라도 신혼의 공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나는 불쑥 힘이 난다.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하던,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등푸른 물고기처럼 푸릇푸릇하고 싱싱하던 그때의 내 마음을 다시금 만나기 때문이다.

신혼집을 마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내게 행운이다. 그 집은 조금씩 잃어버리고 살아온, 밝고 따뜻하고 여유로웠던 새댁의 미소를 나에게 가끔씩 일깨워준다.



주간동아 225호 (p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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