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4

2006.07.18

‘회전문 인사’와 ‘코드 인사’ 언제까지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입력2006-07-14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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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전문 인사’와 ‘코드 인사’ 언제까지
    노 무현 대통령이 교육부총리와 경제부총리 등을 경질하면서 일련의 낯익은 얼굴들로 내정하자, 민심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 ‘역시나’ 하는 냉소적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요직에 내정된 인사가 모두 자리만 이리저리 바꾼 ‘대통령의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급기야 “정치를 하면서 생각이 같은 사람을 써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쓸 수 있느냐”며 코드 인사를 강력하게 두둔하고 나선 청와대 참모도 있다. 그 자체로 보면 일리 있는 말이지만, 맥락이 적절해야 한다. 정치를 할 때는 ‘국민’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써야지, 어떻게 ‘국민’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이번 개각은 민의를 존중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정부와 여당의 거듭된 부동산 정책 실패, 교육정책의 난맥상 등 총체적 정책 실패와 무능 및 아마추어리즘이 국민들로부터 준엄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겸허한 정신으로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심기일전하는 자세가 민의 대표성을 갖는 민주정부가 갖춰야 할 책임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 인사를 보면 기존의 방식대로 개혁을 밀고 나가고, ‘민의’와 대화하기보다는 ‘역사’와 대화하는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한 것 같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노무현 정부가 집중해야 할 문제라면 ‘임기말 레임덕 현상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 ‘대통령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어떤 자리에 배치할까’ 하는 문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그런 문제들의 전제가 되는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 즉 ‘정치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행적에 대한 비판이 비등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만을 되뇔 뿐, 고양해야 할 ‘정치의 질’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있다. 권력을 차지한 뒤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하면서도 어떤 정신을 가지고 국민을 대하고 국정에 임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선거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했다고 해서 대통령이 임기 동안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어떠한 국정 어젠다라도 추진하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중용하면서 ‘역사’가 평가해주기를 갈망한다면 이는 민주정치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인사 때마다 ‘대통령의 남자들’ 자리 바꿔 앉기



    민주정치란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치, 즉 수월성을 갖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자신의 경륜과 비전을 펼치는, 이른바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를 지향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여정부 3년 동안 모델만 많고 실천은 없으며, 대선을 인연으로 한 ‘대통령의 남자들’이 국정 전면에 포진하여 펼친 ‘아마추어 정치’ 및 ‘코드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번 인사에서 정부의 태도는 교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강화되는 조짐을 보여 걱정이다.

    참여정부가 아직도 ‘개혁’이나 ‘역사’를 고집하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절벽’ 위를 걸으면서도 ‘구름’이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찾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이 연상된다. 민의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역사가 ‘새로운 구름’이나 ‘멋진 무지개’로 보인다면서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다. 절벽 위에서 그 구름을 잡으려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절벽에서 추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와 여당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구름을 잡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절벽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 또 ‘위의 구름’을 볼 것이 아니라 ‘발밑의 절벽’ 아래에 있는 들판을 보아야 한다. 그 들판은 실질적인 사람들의 삶이고, 애환을 가진 보통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 민주정부의 책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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