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2000.11.30

‘문화적 경건주의’ 족쇄 풀어라

  • 입력2005-06-01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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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적 경건주의’ 족쇄 풀어라
    김구 이순신 안중근 심청!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답을 쉽사리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 제작되어 무대에 올려진 오페라 이름들이다. 역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은 인물들을 오페라의 주제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일일까. 그 답은 부정적이다.

    가끔 오페라 극장을 찾는 사회과학도로서, 턱없는 지원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가녀린 예혼(藝魂)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김구 이순신 안중근 등의 역사 인물 시리즈로 만들어진 최근의 오페라를 보면서 예술적 작품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무거운 주제에 질식할 지경이다. 이순신이나 안중근이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예술적 승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오페라로 만들어지는 그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필경, 문화관광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주제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좀 더 크게 보자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경건주의 내지는 엄숙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고, 또 가능하면 집합주의적 정서에 부합하는 작품이라야 좋은 것이라는 근시안적 사고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문화적 경건주의라는 범주에 드는 작품이라야 재정지원이 가능한 현재의 문화정책 시스템도 문제고, 그러한 사고에 머물러 있는 높으신 분들의 칼자루도 위험해 보인다.

    사실, 우리가 예술적 작품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문화적인 교훈이다. 문화적인 감동일 뿐이다.



    섣불리 도덕적인 교훈을 주입하고자 했다면 그 의도는 산산히 부서졌으며, 투입한 예산은 낭비되었고, 문화적 작품성은 일회용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이 즐길 만한 작품을 제작하고 연주해내지 않으면, 지속성 있는 문화적 성취의 축적은 어렵다.

    이미 135년 전 베르디가 작곡한 돈 카를로(Don Carlos)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름다운 한 여인을 놓고 다투는 광경을 다루고 있으며,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는 여왕의 잔혹한 남자편력을 소재로 삼았다. 135년 전 서구 사회가 수용했던 작품들도 오늘날 한국사회의 검열시스템 앞에서는 무대에 오를 길이 없을 것이다. 공연윤리심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나 법원의 근시안적 검열실태 이전에, 우리 스스로가 쳐놓은 경건주의라는 검열 시스템이 철저하게 걸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지원 칼자루에 오페라 소재도 춤춘다

    우리의 문화적 환경을 보자면, 인간의 욕구에 대한 대응성이 높은 작품들은 모조리 수입으로 대치해 놓고 또 그것을 고급문화로 치부하면서도, 우리 스스로에 대한 족쇄는 풀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문화 수입만 해도 그렇다. 일본문화 수입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이 좁은 문화적 경건주의의 굴레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 이 사회에서의 문화적 성숙에 대한 고민이 일본문화의 수입에 대한 우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모습과 문화적 표현에 대한 토론은 생략된 채, 단지 일본문화의 수입을 허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대치되었다. 본말이 전도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문화관광부의 청사에는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는 플래카드가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문화의 세기를 맞는 우리의 첫 과제는 ‘푸는 것’이다. 더 풀고, 더 열고, 더 분권화시켜야 한다.

    어설픈 규제와 겉치레 경건주의는 한국인 삶의 질을 옥죄고, 문화적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이중적 인간성을 양산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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