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8

2000.04.06

‘원숭이’ 정치학

  • 입력2006-04-28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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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이’ 정치학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유전학적으로 따져본다면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193종의 원숭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98%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인간만은 털이 없는 것일까.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스먼드 모리스는 인간이 사냥을 하기 위해 털을 벗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어느 순간엔가 인간의 조상은 과일이나 따먹고 살던 처지에서 벗어나 동물을 사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따라서 빨리 달리기가 생존의 관건이었다. 그런데 재빨리 달아나는 동물들을 쫓아가느라 있는 힘을 다해 뛰다 보니 온 몸에서 열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털가죽이 거추장스러워졌고 그래서 털없는 원숭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조상이 털을 벗어던지게 되었다는 추론이다.

    굳이 이런 거창한 가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먹는 문제는 우리 삶 그 자체다. 많고 많은 설움 중에서도 배곯는 설움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간에 ‘밥먹고 합시다’는 동의는 늘 웃음과 더불어 만장일치의 재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뒤돌아 보면 우리 민족은 참으로 가난했다. 윗 세대의 간난(艱難)에다 어찌 감히 견주리요만, 필자도 어린시절 배고픔의 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머니는 모자라는 쌀 대신에 무를 섞어 밥을 짓고는 하셨다. 어린 아들이라고 특별히 쌀밥만 골라 퍼주셨건만, 무 냄새가 어찌나 지독하게 배어 있던지 투정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때 어머니의 밥그릇은 늘 무로만 가득 찼던 기억이 지금에도 아픈 가슴으로 남는다.

    뜻하지 않은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적어도 우리 민족이 ‘보릿고개’의 험난한 길은 넘어섰다고 하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생물학자들은 인간이 유태보존(幼態保存)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하던 행동을 바깥세상으로 나와서도 일부는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고(辛苦)의 역사에 대한 반작용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먹는 문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유태보존’ 집착은 유다른 편이다. ‘진지 드셨습니까?’ 시절은 지나간 것 같은데도, 유치원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영락없이 쪼그리고 앉아 고기를 구워 먹고, 몸에 좋다면 온갖 야생동물에다 벌레까지 가리지 않고 먹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갈비탕 한 그릇 먹자고 민주주의를 떨쳐버릴 것인가

    선거판이 달아오르자 이곳 저곳에서 ‘먹자판’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나라의 운명이야 어찌 되든, 표 얻는 것에만 생사를 건 정치꾼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유태보존’을 자극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식권을 먼저 얻고, 뷔페식당에서 한 점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는 유권자들로 아수라장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이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한다. 원숭이는 원숭이로되 문명의 질서 속에 들어와 살지 않으면 안되고, 그러다 보니 야성(野性)과 윤리도덕의 갈림길 앞에서 너나 없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먹기도 해야겠고, 민주주의도 해야겠고, 이 땅에 사는 ‘정치적’ 원숭이는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그러나 갈비탕 한 그릇, 김밥 한 줄 얻어먹자고 민주주의를 떨쳐버릴 것인가. ‘과식이 만병의 근인(根因)’이라고 하는 시절에도 과연 여전히 ‘먹는 것이 남는 것’일까. 그 정도로 우리가 허기졌는가. 선거철 한때 상전 노릇하자고 4년 내내 노예신세가 되자는 것인가.

    ‘유태’에 대한 향수가 지나치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 ‘먹자’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람을 감히 어떻게 보기에!’ 하며 일갈(一喝)할 용기가 없다면 진짜 원숭이가 친구하자고 해도 할 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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