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9

2011.05.30

문양만 봐도 흥분 심장 뛰는 축구팬 만든다

엠블럼 무한 애정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 lunapiena7@naver.com.

    입력2011-05-30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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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여름 지구촌이 프랑스월드컵으로 들썩일 때 필자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이탈리아는 8강전에서 프랑스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했다. 빛나는 피파컵을 놓고 다툴 결승전을 기대했던 이탈리아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각도로 패인을 분석했고, 그때 나온 것이 애국심 부족이었다.

    이탈리아 국민은 “프랑스 선수들은 불타는 눈빛으로 국가를 부르고 경기장에서 뼈를 묻겠다는 기세로 국기를 향해 승리 열망을 불태우는 데 반해, 왜 우리 선수들은 국가가 나와도 껌을 씹으며 딴 곳을 바라보느냐. 월드컵 이후의 달콤한 휴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아니냐”며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비장한 각오로 소속 클럽의 엠블럼이 박힌 깃발이나 응원가를 들으면서 우승을 다짐하듯, 국가 간 경기에도 열정을 쏟으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그 후 이탈리아 대표팀이 각성했는지 2000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탈리아 국민의 성토에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각 프로팀 경기장에 걸린 깃발과 엠블럼의 위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팀에 무한 애정을 쏟는 이탈리아 축구팬의 극성은 유명하다. 과연 무엇이 그런 힘을 이끌어낼까.

    이탈리아 반도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 이후 오랫동안 여러 조각으로 분열된 채 도시국가로 명맥을 잇거나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신세로 지내다가 1870년에야 지금의 영토로 통일됐다. 그래서인지 각 도시는 하나의 국가처럼 확연히 다른 특징과 상징이 있다. 경기장에서 팬들의 환호성과 흥분 수위를 조절하는 깃발에 그려진 엠블럼이 의미 없는 상징이 아닌 이유다.

    밀라노에 본사를 둔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알파로메오’의 문장에는 붉은색 십자가와 뱀이 그려져 있다. 이는 밀라노를 지배하던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으로, 지금은 밀라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밀라노를 연고지로 삼은 AC밀란도 엠블럼 오른쪽에 십자가를 넣었고 초창기 인터밀란도 뱀을 엠블럼에 넣었다. 일부 인터밀란 서포터스는 뱀이 독수리나 늑대를 잡아먹는 원색적인 그림을 그려 넣어 응원에 사용하기도 한다.



    SS라치오는 로마제국시대 문장인 독수리를, AS로마는 로마제국의 건국신화 주인공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는 장면을 그려 넣었다. 이 때문에 AS로마 선수들의 애칭은 늑대다. 꽃의 도시 피렌체를 연고지로 하는 AC피오렌티나는 르네상스시대를 연 메디치 가문의 백합 문양을 그대로 사용한다. 토리노를 연고지로 하는 유벤투스FC와 토리노FC도 도시 이름의 어원인 타우리니(소의 사람들)에서 나온 소를 엠블럼에 넣었다.

    비록 유치하고 탐탁지 않은 문양이라도 팬들은 자기 지역을 상징하기에 강한 소속감으로 무한 애정을 보낸다. 구단주가 바뀌는 위기에 봉착하면 더 강한 단결력으로 팀의 고난과 역경을 함께 이겨낸다. 이는 단순히 엠블럼에 있는 상징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단이 지역 팬과 함께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졌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서포터스의 강력한 함성을 모으는 구호, 응원가, 깃발이 모두 엠블럼의 상징에서 탄생한다.

    문양만 봐도 흥분 심장 뛰는 축구팬 만든다
    그러나 우리나라 K리그의 엠블럼에서 각 도시나 지방의 역사, 영광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상징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어떤 상징을 찾기가 어렵다. 구단 모기업이 바뀌면 엠블럼도 따라서 바뀌는 상황이니, 어떤 팬이 이탈리아 축구팬처럼 열정을 쏟겠는가. 이제는 구단이 나설 때다.

    * 황승경 단장은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에서 축구 전문 리포터로 활약한 축구 마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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