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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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우승팀? ‘식스맨’에게 물어봐!

  • 이동훈/ 굿데이신문 종합스포츠부 기자 blue@hot.co.kr

    입력2003-01-29 1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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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우승팀?   ‘식스맨’에게 물어봐!

    리바운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송영진.박재일.강혁.박지현(왼쪽부터)

    서양에서 ‘13’과 ‘6’은 불길한 숫자의 대명사다. 프로농구엔 ‘식스맨’이라고 불리는 여섯 번째 선수가 있다. 주전을 뜻하는 ‘베스트5’에 들지 못하는 선수들이다. 후보선수를 뜻하니, 서양식의 탐탁지 않은 ‘6’의 어감만큼은 아니어도 ‘베스트5’에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현대 농구에서 식스맨의 역할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 1990년대 미국프로농구(NBA) 최고의 팀인 시카고 불스가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현 워싱턴 위저즈)과 ‘만능선수’ 스코티 피펜(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을 앞세워 여섯 번이나 챔피언에 오를 당시 그들의 뒤에는 식스맨 토니 쿠코치(현 밀워키 벅스)가 있었다.

    쿠코치는 ‘식스맨의 역할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불스 왕국’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팀이 공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나 중요한 승부처일 때면 어김없이 등장해 날카로운 슈팅과 적극적인 플레이로 상대팀의 숨통을 조였다.

    출범 일곱 시즌째를 맞이한 한국 프로농구에서도 식스맨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유능한 식스맨을 보유해야만 우승권에 접근할 수 있는 것. 식스맨을 적절히 활용하면 주전선수들의 체력을 비축할 수 있고, 특히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반대로 마땅한 식스맨이 없는 팀들은 고전하기 일쑤다.

    2000∼2001시즌 삼성은 식스맨의 활약을 발판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삼성은 당시 강혁(현 상무)이란 최고의 식스맨을 보유, 한 시즌 최다승 기록과 함께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챔피언결정전에서 LG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해 명실공히 그 해 최고의 팀이 됐다.



    당시 삼성은 포인트가드 주희정, 슈터 문경은, 파워포워드 아티머스 맥클래리에 ‘슈퍼 루키’ 이규섭을 확보하고 있어 시즌 전부터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정규리그 도중 문경은이 부상하는 악재로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삼성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식스맨 강혁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전반에 뒤지고 있던 경기를 후반에 가서 뒤집는 뒷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식스맨의 역할 덕분이었다. 투지와 공에 대한 집착력이 강했던 강혁은 돌파나 외곽슛에도 능해 ‘주전 같은 식스맨’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올 시즌 동양과 LG는 좀처럼 선두권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동양과 LG에겐 공통점이 있다. 풍부한 벤치 멤버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후보선수들 중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 식스맨으로 기용하기가 좋다.

    동양의 경우엔 박지현 박재일 이현준 등이, LG엔 박규현 김재훈 송영진 정선규가 식스맨의 역할을 하고 있다. 루키 박지현은 김승현이 출장정지와 부상 등으로 잠시 빠져 있는 동안 팀을 조율하며 동양의 연승 행진을 주도했다. 박지현은 다른 팀에 가면 당장 주전 포인트가드로 뛰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 우승팀?   ‘식스맨’에게 물어봐!

    NBA 최고의 식스맨 토니 쿠코치.

    동양 김진 감독은 최근 ‘베스트5’ 대신 ‘스타팅5’라는 용어를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주전과 식스맨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선발선수로 내보내더라도 전력의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식스맨을 어느 때, 어느 순간에 투입하느냐가 감독 용병술의 절대 과제이기도 하다.

    반면 삼성과 TG는 올 시즌 식스맨의 부재로 고전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자유계약(FA) 선수가 된 국내 최고 센터 서장훈을 SK 나이츠로부터 영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만큼의 출혈도 감수해야 했다. 프로농구에는 샐러리캡(연봉상한제)이라는 제도가 있다. 샐러리캡은 한 구단 모든 선수의 연봉을 합산한 금액이 일정액을 넘지 않게 하는 제도다. 우수 선수들이 한 팀으로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한국 프로농구의 샐러리캡은 11억5000만원이다. 올 시즌 서장훈의 연봉은 무려 4억3100만원. 팀 전체 연봉의 절반에 가깝다. 삼성은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 많은 선수들을 다른 구단에 내줘야 했다.

    서장훈의 맹활약으로 삼성은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5연패에 빠지는 등 주전들의 체력이 바닥난 듯한 인상이다. 시즌 직전, 삼성은 식스맨으로 기용할 만한 선수가 없기 때문에 후반부에 들어 고전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대체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1월14일 모비스에게 22점 차로 이기다 역전패당한 것이나 22일 LG에게 4쿼터 2분여까지 16점 차로 앞서다 경기 종료 직전 1점 차로 역전패당한 당한 것이나 삼성에게 쓸 만한 식스맨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TG도 슈퍼 루키 김주성과 함께 용병 최고의 센터 데릭 존슨, 슈터 양경민, 가드 허재를 보유하고도 얇은 선수층으로 인해 장기레이스에서 체력 문제로 고전하고 있다. 또 타구단에 절대 뒤지지 않는 ‘베스트5’를 보유하고도 경기 도중 승부처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것도 식스맨의 부재 탓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각 팀에서 식스맨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연봉계약이 대부분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식스맨들은 출전시간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 주요 기록 레이스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또 팀의 분위기를 바꿔놓기 위해 나가는 경우가 많고 수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다. 식스맨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3점포를 터뜨리고 호수비를 할 경우 당시 상황에서는 의미가 크지만 금세 잊혀져버린다.

    식스맨은 ‘베스트5’는 아니지만 후보선수 중에서 최고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식스맨에겐 애환이 있다. 주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최단신 선수인 모비스의 김태진(173cm)은 “더 이상 식스맨이나 후보선수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연습하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코트에서 뛰어다닌다”고 말했다.

    농구계에는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워낙 1대 1 개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 운동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잘 타고나야 한다는 얘기다. 식스맨이나 후보선수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농구에서는 주전 자리를 빼앗기가 다른 종목에 비해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오늘도 식스맨을 비롯, 후보선수들은 음지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언젠가 단 한 번 오게 될 기회를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식스맨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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