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9

2002.11.14

한국 축구 전설로 남으리라

  • 최원창/ 굿데이신문 종합스포츠부 기자 gerrard@hot.co.kr

    입력2002-11-07 1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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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축구 전설로 남으리라
    한때 동네 어귀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은 모두 황선홍(34·전남 드래곤즈)이고 홍명보(33·포항 스틸러스)였다. 동네 꼬마들에게 이들의 이름은 영예이자 훈장이었다. 그 훈장을 달고 뛰던 송종국과 박지성이 자신의 영웅이던 이들과 함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기적을 만들어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1990년부터 부침과 영욕을 거듭하며 한국 축구를 이끌어온 황선홍과 홍명보가 15년 동안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아온 태극마크를 후배들에게 영원히 물려준다. 그들의 상징이었던 ‘18번’과 ‘20번’ 등번호와 함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월드컵 16강’은 족쇄였다. 폴란드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벤치에서 가슴 졸이던 황선홍이 필드로 달려나가 홍명보를 얼싸안은 모습, 스페인전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홍명보가 황선홍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나누던 장면은 이 족쇄를 벗어던진 해방의 춤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눈치를 보던 대표팀 막내 시절 참가한 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이들은 “월드컵 첫 승은 반드시 우리가 해내자”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들이 첫 승의 감격을 누리기까지는 무려 12년이 걸렸다.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조별리그 3패로 1라운드 탈락. 역대 최악의 성적이었지만, 새내기였던 이들은 ‘경험은 쌓았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94년 미국월드컵은 달랐다. 주장이었던 홍명보와 한 골밖에 터뜨리지 못한 황선홍은 16강 진입 실패의 멍에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당시 함께 방을 썼던 이들은 쓰디쓴 패배감을 씹고 또 씹었다. 그러나 98년 프랑스월드컵은 더 엉망이었다. 네덜란드전 0대 5 참패. 후방에서 수비를 책임졌던 홍명보도,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한 황선홍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황선홍과 홍명보의 국가대표팀 선발을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히딩크 감독의 까다로운 테스트를 통과해 당당히 주전으로 뛰며 12년 전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

    국가대항전(A매치)에 100회 이상 출전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센추리클럽 가입’의 영예를 얻는 동안, 이들은 어느새 눈가에 잔주름이 선명한 서글서글한 동네 아저씨가 돼버렸다. 11월20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이들은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다. 황선홍과 홍명보. 한국 축구 역사를 새로 쓴 이 ‘13년지기 친구’들은 한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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