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4

2004.03.04

꽃미남 향한 유부녀의 육탄공세

노예로 팔려간 요셉, 주인 아내로부터 집요한 유혹 … 뚜렷한 정체성·가치관으로 극복

  • 조성기/ 소설가

    입력2004-02-26 15: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꽃미남 향한 유부녀의 육탄공세

    잠든 요셉.형들의 질투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는 요셉.보디발 가정의 총무로 일하게 된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시달렸으나 흔들리지 않았다(사진 위부터).

    요셉은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은 아들이다. 라헬은 아들 낳기 경쟁에서 언니 레아에게 밀리자 몸종인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단과 납달리를 낳게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신이 낳은 아들은 없었다. 그런 중에 라헬이 아들을 잉태하여 해산하자 득의양양하여 아들을 더 낳고 싶다는 뜻으로 아이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창세기 30장 25절에 보면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야곱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야곱은 지금은 장인이 된 외삼촌 라반 집에서 14년 동안이나 머슴처럼 일해왔으나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라반 밑에 있다가는 이용만 당하리라는 것을 눈치챈 야곱은 라헬이 요셉을 낳자 가족에 대한 애착이 더욱 생겨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야곱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라헬과 요셉만 있으면 다른 것은 그리 필요하지 않은 듯이 여겨질 정도였다.

    라반의 갖은 방해를 물리친 뒤 야곱이 간신히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즈음, 또 임신을 한 라헬이 난산 끝에 아이를 한 명 더 낳게 되었다. 라헬의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 산파가 라헬에게 소리쳤다.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라헬은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어주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이를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지극히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자 야곱의 애정은 라헬의 친아들들인 요셉과 베냐민에게로 기울어졌다. 다른 형제들의 시기를 사게 된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스마엘 대상들에게 팔리고 말았다.

    위험한 줄 알면서 빠지고 싶은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더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지만 요셉의 인생은 더하기는커녕 자꾸만 빼앗기기만 하였다.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따뜻한 가정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스마엘 대상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아넘겼다. 비록 종의 몸으로 허드렛일을 하였지만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요셉을 보디발은 가정총무로 세워 집안일 전체를 돌보도록 하였다.

    요셉의 용모는 준수하고 아담한 편이었다. 아마도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은 요셉과 대조적으로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것이다. 시위대장은 요즘 말로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라 바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언제나 곁에서 그를 호위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는 날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아내에게 자상하게 대해주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일에 쫓기는 남편을 둔 사모님들이 보통 그러하듯 보디발의 아내도 남자의 자상한 사랑을 받아보고 싶고 남자의 뜨거운 가슴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 준수한 용모를 지닌 히브리 청년 요셉이 가정총무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반하고 말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틈만 나면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유혹하였다.

    그녀는 요셉의 욕정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향수를 뿌린 후 요셉에게 접근하였을 것이다. 청년인 요셉이 그런 유혹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먼 이국땅에서 외롭게 지내는 나그네 같은 요셉으로서는 마음의 허전함을 정욕으로 채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유혹은 함정과도 같고 늪과도 같다. 어떤 여자는 아무런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에게 엄청난 유혹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자를 흔드는 파장을 내보내기 때문 아닐까. 그런 여자가 말과 행동으로 남자를 유혹한다면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유혹의 말과 행동으로 남자에게 접근하면 십중팔구 남자의 정신은 혼미해지게 마련이다. 남자가 그 여자를 경멸할 정도로 꺼린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순간 오히려 그 여자를 간절히 원하게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빼어난 인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에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사원소설을 주장한 그리스 자연철학자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화산의 분화구로 뛰어 들어간 사람이다. 우리가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로 뛰어들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끼는데, 그런 심리를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황순원은 ‘독 짓는 늙은이’라는 작품에서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를 비장하고 아름답게 잘 형상화하였다.

    자존심 상한 보디발의 아내 요셉에게 누명 씌워

    이성간의 유혹에도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가 작용하기 쉬운 법이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분명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넘어가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이런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정체성과 가치관, 인생관이 튼튼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요셉이 자신을 쫓아낸 형들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빠져 있었다면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집트의 사창가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신앙을 본받아 자기 정체성과 가치관, 인생관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요셉은 동침하자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했다.

    “나의 주인이 제반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까.”

    이를 통해 요셉이 보디발 집안 청지기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얼마나 뚜렷했는가를 알 수 있다. 주인인 보디발이 자신을 믿고 집안일 전체를 맡겼는데 어떻게 주인의 신뢰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분명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보디발 아내와 동침한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대낮에 거리에서 행한 것처럼 훤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가 없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주인인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일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그와 같이 요셉이 분명하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는데도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끈질기게 요셉을 유혹하며 동침하자고 하였다. 날마다 요셉을 유혹할 궁리를 짜내었을 보디발의 아내도 대단한 여자라 할 수 있다. 하긴 보디발의 아내로서는 요셉 그 자체가 큰 유혹인 셈이다.

    하루는 요셉이 가정총무 일을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가자 보디발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요셉의 옷을 잡아끌어 안방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요셉이 뿌리치고 달아났으나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옷을 세게 잡고 있었던지 요셉의 옷은 그녀의 손에 그대로 남고 말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거절한 데 대해 무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여 앙심을 품고는 오히려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요셉의 옷을 증거물로 내어놓았다. 요셉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간절한 유혹을 거절하는 남자들은 여자의 반격을 받게 마련이다.

    요즈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성희롱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나 남자에 대한 여자의 성희롱은 여자들이 보디발의 아내처럼 농간을 부리기만 하면 오히려 남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날마다 유혹의 지뢰밭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진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