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7

2020.07.10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꿈꾸는 인공지능 [궤도 밖의 과학]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입력2020-06-23 11: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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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계를 슬기롭게 만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의학계를 슬기롭게 만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다. [게티이미지]

    “우리 딱 10분만 있다가 시작해요. 아이가 매년 어린이날마다 돌아가신 아빠 때문에 울면서 보낼 수는 없잖아요.” 

    의사들의 우정과 인간미를 다룬 이야기로 따뜻한 울림을 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명대사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져 장기를 기증하게 된 다섯 살 아이를 배려하는 의사의 마음 씀씀이가 깊은 여운을 안겼다. 이런 의사가 세상에 또 있을까. 등장하는 평범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우 훌륭하다. 심지어 너무 인간적이라 오히려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한 드라마 속 99학번 의대 동기들의 이야기는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의학계에 비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소재로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의료 인공지능(AI)이다. 알고리즘이 인간을 진료하는 게 가능할까. 세계 최초 의료 인공지능으로 불리는 IBM의 ‘왓슨’은 ‘제퍼디!’라는 미국 유명 TV 퀴즈쇼 참가자 출신이다. 1997년 IBM은 열심히 개발한 인공지능이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자, 이후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IBM 연구팀 매니저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목격한, 모두가 퀴즈쇼를 보느라 정신없는 광경이 도전 종목을 바꾸게 한 것이다.

    IBM사의 왓슨이 2011년 1월 13일 제퍼디 미국 퀴즈쇼에 출연하고 있다. [AP=뉴시스]

    IBM사의 왓슨이 2011년 1월 13일 제퍼디 미국 퀴즈쇼에 출연하고 있다. [AP=뉴시스]

    2010년 인공지능 왓슨은 ‘제퍼디!’에 출연해 두 사람을 압도적인 차이로 꺾고 우승했는데, 한 명은 상금왕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최다 연승 기록 보유자였다. 당시 왓슨은 자연어 형식으로 된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한 것은 물론, 인터넷에도 연결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며 능숙하게 정답을 찾아냈다.

    의대 동기 없는 외톨이 99학번 왓슨

    IBM이 만든 의료 인공지능 왓슨.[위키피디아]

    IBM이 만든 의료 인공지능 왓슨.[위키피디아]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왓슨은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임상의학 분야다. 학교에 수학 문제를 빨리 푸는 녀석, 공을 잘 차는 녀석, 글을 기막히게 써내려가는 녀석이 있는 것처럼 왓슨도 그랬다. 슈퍼천재 왓슨 혼자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종양학 전문가 왓슨, 방사선학 전문가 왓슨, 내분비학이나 유전체학 왓슨처럼 다양한 왓슨이 있다. 물론 아쉽게도 이들은 서울대 의대를 함께 나온 같은 학번 동기가 아니다. 그저 자기 분야에 최적화된 방대한 분량의 의료 데이터를 열심히 읽고, 그 안에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뿐이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과정이 의사의 초기 판단을 돕고 치료법을 추천해줄 수 있다. 특히 엑스레이나 단층촬영 이미지로 만들어진 의료 데이터를 판독하는 부분에서 인공지능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의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라는 인공눈으로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다양한 순간을 모조리 담아내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그 안의 숨겨진 의미를 분석하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연속적인 의료 데이터를 바탕으로 향후 나타날 질병을 예측하거나, 다양한 전자기기를 통해 수집한 생체정보를 토대로 건강 상태를 관리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의료 분야에 굳이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 분야 역시 공부해야 할 자료가 지금도 셀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의사나 약사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 의사가 되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이해하게 될까. 이건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학문의 정수를 깨치고 지식의 보고를 헤엄쳐 다닌다는 말만큼 우습다. 

    새로운 전공 서적은 매일 쏟아져 나오고, 신종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학문을 실제로 다루는 의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숙달해야 한다. 하지만 의사 개개인이 모든 논문과 매일 쏟아지는 의료 데이터를 쉬지 않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왓슨은 클라우드 시스템을 통해 각 병원에서 의료 데이터를 수집하고 본사 서버에 축적하면서 매일매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 낮에는 진료로 바쁜 의사가 밤에는 공부라니, 끝없이 주경야독을 하는 셈이다.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유리하다. 인공지능은 피로가 누적된 인간 의사가 놓치기 쉬운 미세한 검진 결과의 차이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태연하게 찾아낼 수 있고,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환자의 징후를 발견하고 예측해 미리 조치할 수도 있다. 숙련된 의사가 꺼려하는 지역에서 현지 의료진의 판단을 도와 세계 의료 사각지대를 줄이고, 나중에는 국가를 넘어 인류 차원의 경험을 축적해 암 치료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낼지도 모른다. 

    “교수님, 제 선택에 환자 목숨이 달렸는데 잘못 판단하면 어떡해요? 앞으로 저한테 수많은 판단의 순간들이 올 텐데, 저는 자신이 없는데 어떡하죠?” 흉부외과 레지던트의 고민에 대해 슬기로운 부교수 준완은 이렇게 말한다. “안 바쁘면 알려주겠다”고. 하지만 안 바쁠 수가 없다. 의사는 늘 바쁘다. 만약 영원히 바쁠 일 없이 뭔가를 알려주려고 기다리는 아주 똑똑한 친구가 있다면 어떨까. 수많은 의료 인공지능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의료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기에 의사나 약사, 간호사 같은 의료계 종사자의 통찰력에 이바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한 순간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동료가 있다면 이보다 더 유용한 도움은 없을 것이다. 물론 힘든 수술을 마친 뒤 삼겹살에 사이다 한 잔 곁들이며 후일담을 나눌 수는 없지만 말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변화의 시작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여운으로 남긴 주인공들. [tvN 제공]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여운으로 남긴 주인공들. [tvN 제공]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사회 여러 곳에서 비대면 문화가 새로운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미국은 원격 의료로 의료진의 감염 확률을 줄이고 있고, 중국은 애플리케이션(앱) 전문 상담 서비스를 통해 의사 수천 명이 매일 수십만 명의 환자를 진료한다. 이 과정에 이들의 수고를 극적으로 덜어줄 의료 인공지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시범적으로 각종 규제를 풀고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내고자 노력 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1초 만에 영상으로 연결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직 의사와 환자만 의료법이라는 장벽 때문에 소통할 수 없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의학은 생명을 다룬다. 반드시 명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결정해야 하고, 늘 엄밀하게 검증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최초 의료 인공지능 왓슨조차 진료 분야에 따라 의료진과 의견이 일치하는 비율이 천차만별이다. 지역/문화 차이로 발생하는 특성이 반영될 만큼 현지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고, 과도한 마케팅으로 성능이 과장됐다는 평가도 있다. 안타깝게도 개척자인 왓슨의 한계는 계속 드러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왓슨 시대가 끝났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는 선구자로서 왓슨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이지, 의료 인공지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올림푸스, 지멘스 같은 외국계 기업뿐 아니라, 정부 주도로 국내 대형병원들 역시 차세대 의료 인공지능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의료 인공지능을 위해서는 정보기술(IT) 인프라가 충분한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세계 최초로 5세대(5G) 이동통신망 상용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것 딱 하나다. 그리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슬기로운 호모사피엔스뿐이다. 질병과 생존의 전선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줄 모르는 의료진은 그게 가능한 의사들로 대체될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의료 인공지능이 기존 의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세부적인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개인의 의료 데이터가 무분별하게 공개됐을 때의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히 보호받아야 할 개인정보다. 어떤 형태로 활용할지,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지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앞으로 슬기로운 의사들이 상상하는 최선의 미래에는 새로운 형태의 의료 인공지능이 가장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류의 수명과 건강에 대한 혁신적인 도약이 가능한 현 시점에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나 무지에 의한 공포는 한 걸음을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월트 디즈니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그룹을 만든 그의 형 로이 디즈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정은 더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스스로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 따라올 의료계의 손쉬운 결정이 기대된다.


    궤도_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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