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66

2020.11.27

주종 구분 어려운 빅블러, 고급 술로 성큼 다가와 [명욱의 술기로운 생활-39]

와인처럼 발효한 현미 막걸리, 오로지 사과로 만든 발포주

  • 명욱 주류 문화 칼럼니스트

    blog.naver.com/vegan_life

    입력2020-08-21 10: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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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산업계와 마케팅 분야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빅블러(Big Blur)’다. 빅블러란 산업간, 업종간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이 발전하면서 테슬라 같이 내연차를 만들어보지 않은 자동차 제조사가 등장하고, 포털 및 메신저 서비스를 하던 IT기업이 쇼핑과 금융 서비스에 나서는 것이 빅블러의 대표적 현상으로 거론된다. 주류업계에서도 이러한 빅블러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주종(酒種)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막걸리에 예술을 입히다

    경기 평택에서 생산한 현미로 만드는 ‘호랑이배꼽 막걸리’(왼쪽 사진).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이계송 화백(오른쪽 사진 오른쪽)이 그의 딸 이혜범 씨와 함께 만든다. [호랑이배꼽 막걸리 제공]

    경기 평택에서 생산한 현미로 만드는 ‘호랑이배꼽 막걸리’(왼쪽 사진).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이계송 화백(오른쪽 사진 오른쪽)이 그의 딸 이혜범 씨와 함께 만든다. [호랑이배꼽 막걸리 제공]

    보통 ‘막걸리를 빚는다’고 하면 명인이나 장인이 그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랜 전통이기도 하고, 어릴 적 추억을 돌이켜보면 마을마다 막걸리 장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막걸리는 좀 다르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계송(72) 화백이 만드는 막걸리이기 때문이다. 

    이 화백은 한국 고유의 오방색을 바탕으로 한 색으로 추상 작품을 그려왔다. 그는 각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그림을 그리는 지 자신도 알지 못하며, 그걸 안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고집이다. 

    이러한 그가 고향인 경기 평택에 막걸리 ‘호랑이배꼽 막걸리’ 양조장을 세운 것은 약 10년 전. 프랑스 와인이 예술 분야와 왕성하게 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한국 막걸리에도 예술을 입히고 싶었다. 

    우선 좋은 막걸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 화백은 평택에서 난 현미를 가지고 100일 가량 숙성시켜 막걸리를 빚었다. 일본 사케는 도정을 많이 할수록 가격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쌀의 겉면에는 좋은 영양과 맛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쌀을 찌거나 삶지 않고 생쌀 그대로 발효한다는 것. 일반적인 생쌀 발효는 문헌에 근거한 방법대로 진행되지만,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다르다. 마치 와인의 포도처럼 생쌀을 껍질째 발효한다. 



    이 막걸리 병의 대표 색은 노란색. 노란색이 오방색의 정중앙에 있는 색이기 때문이다. 패키지에 입힌 애교 있어 보이는 호랑이 민화는 물론 이 화백이 직접 그렸다. ‘호랑이배꼽’이라 이름 붙인 것은 평택이 지리적으로 한반도 호랑이의 단전(丹田)에 위치하기 때문. 평택을 알리기 위한 작명인 셈이다. 

    호랑이배꼽 막걸리에는 청주가 주는 뭉근한 단아함과 현미가 주는 매끈함이 살아있다. 알고 보니 이 화백의 부친은 평택에서 배 과수원을 운영했고, 그 맛과 향에 익숙해 막걸리에서 배의 향미를 추구했다고 한다. 막걸리에서 배로 빚은 와인을 찾는 듯한 복잡미가 이 술의 매력이다.

    예산 사과와인을 오크통에 장기 숙성

    충북 충주에서 생산되는 사과 발포주 ‘레돔 시드르’(왼쪽)와 이 술을 만드는 프랑스 출신의 도미니크 에어케 씨. [레돔 시드르 제공]

    충북 충주에서 생산되는 사과 발포주 ‘레돔 시드르’(왼쪽)와 이 술을 만드는 프랑스 출신의 도미니크 에어케 씨. [레돔 시드르 제공]

    충북 충주에서는 샴페인과 맥주, 막걸리 감성을 모두 가진 독특한 술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출신 와인 전문가 도미니크 에어케(51)와 소설가 신이현(54) 부부가 만드는 사과 발포주 ‘레돔 시드르’다. 레돔은 에어케 씨의 애칭이고, 시드르(cidre)는 ‘사과 발포주’라는 뜻의 프랑스어. 우리에게 친숙한 사이다(cider)의 어원이다. 시드르는 사과 스파클링 와인이나 맥주와 맛이 비슷하다고 평가된다. 발포성 좋은 탄산감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만난 이 부부는 와이너리 운영에 대한 꿈을 키워오다가, 2016년부터 충주의 한 과수원을 빌려 시드르를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6000㎡ 규모의 농지를 구입, 본격적인 시드르 제조에 나섰다.
     
    레돔 시드르는 일반적인 제조공정을 따르지 않는다. 사과 발포주이지만, 내추럴 와인 스타일로 술을 빚는다. 내추럴 와인이란 원재료(포도) 외에는 다른 것을 거의 첨가하지 않는 와인 제조법. 일반 와인에는 첨가되는 아황산은 물론 술을 만드는데 필수인 효모균도 넣지 않는다. 레돔 시드르는 오직 사과로만 제조된다. 사과껍질에 붙은 효모가 사과의 당을 알코올로 바꿔주면서 부산물로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샴페인처럼 탄산을 만들어준다. 이러한 제조기법을 통해 이 술은 샴페인, 맥주, 와인 등 다양한 주류의 특성을 모두 갖는다. 레돔 시드르에서는 우리 전통주에서 느껴지는 뭉근한 누룩향도 난다. 

    레돔 시드르의 또 하나 특징은 농법. 별자리를 보고 농사를 짓는다. 매해 별의 움직임에 맞춘 ‘파종 달력’이란 게 있다. 태양, 달,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12개 별자리의 움직임에 따라 우주의 파동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 파동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식물의 특성을 분류한 농법(‘생명역동농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다. 신씨는 농부 농[農]이 별[辰]과 노래[曲]의 결합이라며, “농부란 결국 우주의 순리에 순응해 농사짓는 사람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충남 예산에서 생산되는 사과 브랜디 ‘추사’(왼쪽). 이 술은 오크통에서 3~5년간 숙성된 뒤 제품으로 출시된다. [예산사과와이너리 제공]

    충남 예산에서 생산되는 사과 브랜디 ‘추사’(왼쪽). 이 술은 오크통에서 3~5년간 숙성된 뒤 제품으로 출시된다. [예산사과와이너리 제공]

    프랑스 노르망디에는 깔바도스(Calvados)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에서 유명한 술은 사과로 만든 증류주, ‘깔바도스’다. 이 지역은 위도가 높아 포도 농사가 어렵다. 그래서 한랭성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사과로 술을 빚는 것. 증류주를 만들려면 우선 사과로 발효주(시드르)를 만든 뒤 이것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다.
     
    이러한 깔바도스와 유사한 술이 한국에서도 생산되고 있다. 충남 예산의 예산사과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사과 브랜디 ‘추사’가 그것. 이곳은 2ha 규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재배해 사과 와인과 사과 브랜디를 주로 제조한다. 제품명이 ‘추사’인 것은 예산이 추사 김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제품 패키지에도 추사의 그림이 들어간다. 

    이 와이너리는 예산 부사(富士)로 사과 와인을 만든 뒤 상압식 증류기를 거친 술을 프랑스 나무로 만든 오크통에 넣고 3~5년간 숙성시킨다. 제조에서 출시까지 5~6년이 걸리는 셈이라, 기다림의 미학이 있는 술이라 하겠다. 주로 위스키에서 나는 초콜릿, 헤이즐럿 향과 커피 향, 그리고 부사가 주는 상큼함이 살아 있는 맛이다.

    “우리 술도 고급 술”이란 인식 갖게 되길

    주류 빅블러 현상을 보면서 제품 간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경쟁 양상 역시 달라졌음을 느낀다. 위스키에 소다를 넣어 맥주 대신 마시기도 하고, 와인 대신 다양한 전통주를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달라진 술 문화가 ‘고급 술은 수입주류’라는 오랜 인식을 깨뜨리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농산물로 만든 독특한 술들이 수입주류와 경쟁을 벌일 만큼 수준 높은 제품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 남들과 다름을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러한 우리 술은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빅블러 현상이 더욱 가속화된 현재, ‘위기는 기회’라는 해묵은 표현이 다시금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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