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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을 넘어 ‘20세기의 바울’을 꿈꾸다

50주기 맞는 20세기 최고 신학자 칼 바르트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8-12-07 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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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칼 바르트 아카이브]

    칼 바르트 [칼 바르트 아카이브]

    20세기 3대 신학자로 불린 사람들이 있다. 3명 다 독일계 목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자유주의 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은 폴 틸리히(1886~1965), 독일계 미국인으로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창한 라인홀드 니버(1892〜1971), 그리고 12월 10일 50주기를 맞는 독일계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다.

    이 셋을 언급할 때 바르트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강렬해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도 바르트였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독일 사회가 물질적·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던 1919년 발표한 ‘로마서’를 통해 당대 주류 신학이던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중심주의와 결별을 선포하고 신(神)중심주의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에서 神 중심으로

    칼 바르트(왼쪽)와 마틴 루터 킹. [칼 바르트 아카이브]

    칼 바르트(왼쪽)와 마틴 루터 킹. [칼 바르트 아카이브]

    19세기 독일에서 꽃피운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 말씀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동시대적 문맥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을 유연하게 허용한다. 계몽주의 이후 지식의 눈부신 발전과 기독교 신앙의 양립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의 닻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에게 내리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 호전주의를 견제,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동조하거나 편승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바르트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예민하게 감지했고 ‘로마서’를 통해 그 탈출구를 모색했다. 그것은 절대적 예수 신앙을 통해 한계 상황을 돌파했던 바울(가톨릭의 바오로)의 재발견이자 실존주의 사상의 선구자였던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재발견이었다. 신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절대적 타자이기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넘어 말씀과 계시의 하나님으로서 바울의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같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바르트의 이런 선지자적 통찰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당시 독일 기독교계는 예수가 영적 메시아라면 히틀러는 정치·경제적 메시아라는 믿음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있었다. 교회는 물론, 신학대에서도 ‘하일 히틀러!’를 외치지 않으면 이단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를 적(敵)그리스도로 생각하는 극소수 기독교인이 고백교회운동을 펼칠 때 그 구심점이 된 인물이 바로 바르트였다. 결국 1935년 독일에서 추방된 바르트는 고향 스위스로 돌아가 기독교적 양심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이후 그는 30여 년의 세월 동안 13권이나 되지만 끝내 미완성작이 된 대작 ‘교회교의학’ 집필에 전념하며 위기에 빠진 기독교를 바울의 반석 위에 재정초하고자 했다.


    실존적 틸리히, 실용적 니버

    [wesleywildman 블로그, The Life picture Collection]

    [wesleywildman 블로그, The Life picture Collection]

    역시 히틀러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던 틸리히는 그보다 2년 앞서 1933년 비유대인 교수로는 가장 빨리 독일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언신학대 교수가 된 그는 이후 왕성한 저작 활동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가 된다. 그의 이름이 독일식 파울이 아니라 미국식 폴로 호명되는 이유도 거기 있다. 틸리히는 바르트와 달리,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시대적 변화를 따르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응답의 원천으로서 기독교신앙의 정당성을 기초했다.

    유니언신학대에는 또 다른 거물이 있었으니 바로 니버였다. 니버는 젊은 날의 바르트처럼 노동조합을 지지하면서 사회주의에 경도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인간이성에 대한 낙관론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기독교 현실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 기본 사상은 이렇다. 개인은 노력에 의해 도덕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집합으로서 사회와 국가는 개인에 적용되는 도덕 잣대를 적용할 수 없는 압도적 상황을 마주할 때가 많다. 거기엔 개인윤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윤리를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건설하려 하기보다 그 부패와 타락을 적정 규모에서 견제해야 한다. 그 사상이 집약된 책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다.

    지금은 고인이 된 고범서 전 숭실대 총장은 이 3인의 신학자가 내세운 사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바르트는 절대적이고, 틸리히는 실존적이며, 니버는 실용적이다.”

    이 3인을 능가할 뻔했던 독일 신학자가 있다. 바르트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 평가했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45)다.

    바르트와 틸리히보다 스무 살, 니버보다 열네 살 적었던 본회퍼는 유니언신학대에서 틸리히, 니버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릴 수 있었다. 유대인을 박해한 히틀러에 대해 누구보다 강렬히 저항하던 그는 1937년 역시 독일에서 추방된 뒤 유니언신학대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은 수난받고 있는 조국의 기독교신자를 외면할 수 없다며 다시 독일로 돌아갔고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서른아홉 나이로 순교했다.

    아까운 나이에 요절해 신학자로서 주저를 남기진 못했지만 20세기 기독교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아로새겨진 본회퍼에겐 바르트와 틸리히, 니버의 사상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가 남긴 묵상시 ‘자유를 찾는 길’의 ‘행동’ 구절을 음미해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라’와 ‘소심한 망설임에서 삶의 풍파 속으로 나오라’는 구절에선 절대자 앞에서 실존적 문답을 찾았던 틸리히를 느낄 수 있다. ‘가능한 것 속에 떠 있지 말고 용감하게 현실적인 것을 붙잡으라/ 자유는 사고의 도피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행동 속에만 있다’는 구절에선 불의에 맞서고자 폭력도 수용했던 니버의 현실주의가 번뜩인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만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자유는 기쁨으로 네 영혼을 맞이하리라’는 구절에선 말씀과 계시의 하나님을 등불로 삼았던 바르트가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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