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9

2017.12.27

황승경의 on the stage

한 배심원의 ‘합리적 의심’, 아버지 살해범 누명 쓴 아들 살렸다

연극 |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 입력2017-12-26 16:22:16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 제공·극단 산수유]

    [사진 제공·극단 산수유]

    왜 하필 성난 사람이 12명일까. 이 연극은 각자 다른 이유로 화가 난 배심원 12명이 증인들의 편협한 선입견에 감춰진 팩트(사실)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푹푹 찌는 한여름 오후,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 배심원들의 작은 회의실. 누가 봐도 뻔한 유죄 사건인데, 이상하게도 8번 배심원은 딴죽을 걸며 유죄 표결을 하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유치원 교사인 배심원장의 원생들보다 더 산만하고 맘이 급하다. 빨리 야구장에 가야 하는데, 빨리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등등 국민의 의무라 참여는 했지만 각자의 일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가에 사는 용의자는 아버지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도망갔다 ‘심야영화를 보고 왔다’며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온 16세의 천인공노할 아들이다. 증인으로는 직접 살인현장을 목격한 건넛집 이웃과 살해하는 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아들도 목격한 아랫집 노인이 있다.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학대를 받아온 아들은 살해 동기, 살해 도구가 명확한 반면 알리바이는 분명치 않다. 더구나 전과 5범이다. 배심원 12명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할 줄 알았는데 현재 스코어는 11 대 1이다. 그렇다고 8번 배심원이 용의자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유죄에 ‘합리적 의심’이 들었을 뿐이다. 

    범행도구인 접이식 칼은 수평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덩치가 큰 아버지를 아들이 칼로 찌르려면 수직으로 사용해야 한다. 게다가 범인도 아들과 같은 칼을 소유했을 수 있다. 기찻길 건넛집 창으로 범행을 목격했다는 부인은 평소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끼는데, 잠을 자다 안경도 없이 길 건너 범인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을까. 아랫집 노인은 중풍으로 다리가 불편한데, 15초 만에 침대에서 현관까지 걸어 나와 도망가는 아들의 얼굴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 기차가 지나가는 가운데 노인이 윗집에서 범인이 지르는 소리를 아들 목소리라고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을까. 검사는 사건 당일 집에 돌아온 아들이 심야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 알리바이가 명확지 않다고 주장했고, 변호사는 이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 당일 경찰은 아버지의 주검 옆에서 공황 상태에 놓인 16세 소년을 신문했다. 추론과 반론을 거듭하던 배심원은 결국 0 대 12 무죄 평결에 이른다. 

    1954년 미국 극작가 레지널드 로즈가 쓴 이 희곡은 그동안 미국, 인도, 러시아에서 영화로도 제작됐다. 영화와는 또 다른 섬세한 흡입력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류주연의 생동감 넘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은 쓰라린 군중의 민낯을 발견한다. 그렇게 편견과 왜곡을 버린 관객은 13번째 배심원이 돼 사건을 추리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화낼 일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근거 없이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반대하기보다, 8번 배심원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합리적 의심’을 잠시 해보면 어떨까. 혹시 누가 아나. 용기 있는 내 첫걸음이 누군가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 사회를 바꿀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