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2

2018.11.02

김민경의 미식세계

쌉싸래하고 담담한 맛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묵

  • 입력2018-11-05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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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갈한 묵밥.

    정갈한 묵밥.

    경북 경주 토함산에 일출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여행하며 글을 쓰자고 마음먹은 지 오래되지 않은 때라 의욕이 대단했다. 밤인지 새벽인지 모를 깜깜한 시간에 경북 안동에서 출발해 바로 석굴암으로 향했다. 한가을이었지만 한겨울처럼 추웠다. 얇은 겉옷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벌벌 떨며 산에 올랐건만 야속한 해는 빨간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구름 너머로 슬그머니 떠올라버렸다. 허망하고 억울하고 너무 추웠다. 

    산을 내려와 바로 향한 곳이 팔우정해장국거리다. ‘팔우정’은 조선시대에 지은 정자의 이름인데, 세월의 풍파로 무너지고 ‘팔우정비’만 남았다. 그 자리에 로터리가 생기면서 길에 정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주가 관광특구로 지정돼 여느 지역과 달리 하루 종일 영업이 가능했던 1990년대, 이 골목은 밤샘을 한 일꾼과 술꾼으로 언제나 붐볐다고 한다.

    언 몸 녹이는 뜨끈한 묵해장국

    언 몸으로 해장국 집에 들어가 뜨끈한 온돌방에 앉아 해장국 한 그릇을 마시듯이 먹어치웠다. 해장국 하면 선지와 우거지 등이 들어간 얼큰한 국물을 생각할 테지만, 팔우정의 해장국은 선지 대신 도토리묵, 우거지 대신 콩나물과 모자반, 김이 들어간다. 뚝배기에 채 썬 묵과 재료를 소복히 담는다. 뜨거운 멸칫국물을 붓고 잘게 썬 김치를 얹어 얼큰한 맛을 보탠다. 묵해장국을 살살 섞어 먹으면 온기와 부드러움이 담담하게 몸과 마음을 채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산에서 내려와 묵이 아닌 다른 음식을 급히 먹었다면 급체로 고생했지 싶다. 

    묵은 곡식이나 열매에서 얻은 전분으로 만든 음식이다. 도토리, 메밀, 녹두, 동부콩 등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묵의 원료다. 그중 가을에 많이 쑤는 것이 도토리묵이다. 참나무는 종류가 여러 가지라 도토리의 생김도 조금씩 다르다. 이맘때 낮은 산에 올라가보면 도토리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하루 종일 땅에 떨어진다. 산짐승의 먹을거리를 넉넉히 남기고 한 보따리 주워 오면 맛 좋은 묵을 만들 수 있다. 

    도토리는 잘 펼쳐서 햇볕에 바짝 말린다. 그러면 껍질이 갈라져 벗기기가 한결 수월하다. 껍질 벗긴 도토리는 물에 불려 떫은맛을 뺀다. 불린 도토리를 곱게 갈아 커다란 면포에 싼 다음 물을 넉넉히 넣은 볼에 담아 여러 번 치대면 전분기가 물에 우러난다. 이 물을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는다. 이 과정을 2~3번 반복하면 떫은맛이 많이 빠진다. 웃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앙금만 떠서 물을 붓고 묵을 쑤는 것이다. 



    바닥이 두꺼운 냄비에 앙금과 물을 1 대 3 비율로 넣고 중불에서 잘 저으면서 끓인다. 처음에는 재료가 잘 섞이도록 저어주고, 한소끔 끓은 다음에는 바닥에 눋지 않게 저어야 한다. 끓이는 동안 젓기를 멈추면 금방 멍울이 생겨 완성된 묵이 울룩불룩한 못난이가 된다. 

    하염없이 저어 팔이 저릿저릿할 때가 되면 마침내 걸쭉해진다. 이때 소금을 약간 넣고 골고루 섞는다. 불을 약하게 줄이고 뚜껑을 덮어 30~40분 둔다. 양이 적으면 15분 정도로도 충분하다. 밥으로 치면 뜸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뜸을 오래 들이면 묵이 차지고 탱탱해진다. 이때도 가끔 저어줘야 한다.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되면 차가운 물에 걸쭉한 묵을 조금 떨어뜨려 식힌 다음 찰기나 농도를 확인한다. 완성된 묵은 그릇이나 틀에 담아 굳힌다. 냉장실보다 상온에서 굳혀야 촉촉하고 부드럽다. 도토리묵 가루를 판매하니 언제든 묵을 쑬 수 있지만 때로는 가을 한철 재미로 만들어볼 만도 하다. 

    쌉싸래한 향과 맛이 나는 도토리묵은 쑥갓, 깻잎, 미나리, 참나물처럼 향긋한 채소를 곁들여 양념간장에 버무려 먹으면 맛있다. 팔우정 해장국처럼 뜨거운 멸칫국물을 내어 밥 한술 말아 먹으면 담백한 한 끼가 된다. 입맛에 따라 국물에 버섯을 넣을 수도 있고,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도 맛있다. 새콤달콤하게 냉국을 만들어 오이와 묵을 함께 넣어 먹기도 한다. 한겨울에는 도톰하게 썬 묵과 얇게 썬 동치미 무를 찡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한 사발 준비하면 밤참으로 그만이고, 술안주로도 최고다.

    가을이 제철인 묵, 다채로운 요리로 즐겨

    1 경북 경주 팔우정해장국거리. 2 팔우정해장국거리의 묵해장국. 3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묵냉국. 4 향긋한 채소를 넣은 도토리묵 무침.

    1 경북 경주 팔우정해장국거리. 2 팔우정해장국거리의 묵해장국. 3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묵냉국. 4 향긋한 채소를 넣은 도토리묵 무침.

    묵은 도톰하고 널찍하게 또는 손가락 굵기로 썰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말렸다 먹기도 한다. 1~2일 말린 것은 그대로 굽거나 볶아서 먹을 수 있고, 7~10일 말려 딱딱해진 묵말랭이는 냉동실에 두고 요리해 먹을 수 있다. 말린 묵을 요리해놓으면 쫀득하면서 꼬들꼬들 씹는 맛이 굉장히 좋다. 꼭꼭 씹다 보면 마치 고기 같기도 하고, 탄력이 엄청난 국수 같기도 하다. 

    1~2일 말려 꾸덕꾸덕해진 묵은 여분의 가루를 묻히지 않고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그대로 굽는데, 들기름을 두르면 풍미가 더욱 좋아진다. 간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어도 되고 백김치, 파김치, 겉절이 등을 곁들여도 맛있다. 살짝 말린 묵은 간장에 담가 장아찌로 만들어 한두 조각씩 밥반찬으로 먹어도 별미다. 

    일주일 이상 딱딱하게 말린 묵말랭이는 말린 나물과 볶아 먹으면 제일 맛있다. 묵말랭이를 부드러워지도록 충분히 불린 다음 물에 데쳐 간장으로 간을 해 볶는다. 호박오가리, 말린 가지, 말린 토란대 등을 각각 불려 간장, 다진 파 등으로 양념해 볶은 뒤 묵말랭이와 잘 버무려 묵잡채를 만든다. 햇볕에 마르면서 제맛이 도드라진 재료들이 들어가 향이 풍성하고 식감도 다채로워져 먹는 내내 즐거운 음식이다. 

    묵을 쑬 때는 힘깨나 들지만 일단 만들어놓으면 쉽게 다양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입맛 도는 가을날 실컷 먹어도 살찔 염려 없고 밥상, 술상에 모두 어울리니 좋은 사람들과 가을 맛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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