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1

2010.08.23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명종과 정비 인순왕후의 강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8-23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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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강릉에 내리는 비는 명종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강릉(康陵)은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과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심씨의 능이다. 명종의 위(諱)는 환()이며 자(字)는 대양(對陽)이다.

    11대 왕 중종과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은 그의 이복형인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라,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왕의 종아리를 때릴 만큼 독선적이고, 정치적 야심이 컸다고 한다.

    강릉은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의 동북쪽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다. 오른쪽에 태릉선수촌이 있으며, 왼쪽에 삼육대가 인접한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명종은 23년 동안 재위했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을묘왜변 등 국가적 혼란을 겪으며 성군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언적(1491∼1553) 등을 통해 주리성리학을 정립하게 하고 이황(1501∼1570) 등의 활동으로 성리학, 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1545년 7월 1일 인종 승하 후 왕권을 이은 명종은 언제, 어디서 즉위했는지 기록이 없다. 인종이 승하하는 날 문정왕후가 바로 경복궁에 입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일 즉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명종까지 신진사류(사림)가 훈구세력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으로 약 50년간 네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선왕인 인종 때는 25년간의 세자생활과 8개월의 재위 동안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가 실권을 장악했으나,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 동생인 소윤파 윤원형 등이 득세해 대윤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것이 을사사화다.

    이후 약 20년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탓에 명종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권세가 크다 보니 노비 출신으로 정경부인까지 된 그의 애첩 정난정의 위세가 대단해서 뇌물을 받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생사여탈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윤원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인순왕후의 친인척을 가까이 두었으나 그들 역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해 부정축재를 일삼고 자기 세력을 키워 조정은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 무렵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둔 의적 임꺽정이 난을 일으켜 3년간 조선의 행정은 마비되고, 을묘왜변 등 왜구의 약탈로 민간의 고통은 커졌다.

    혼란기에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애쓰던 명종은 1567년(명종 22) 6월 28일 축시(새벽 1~3시)에 후임 왕을 점지하지 못하고 경복궁 양심당에서 세상을 하직할 기미를 보였다. 왕실과 조정은 선왕 승하에 대한 슬픔에 앞서 차기 왕(사왕·嗣王) 선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날 밤 상왕의 병이 위독해 두 정승을 부르나 이미 퇴청했고, 왕이 신음하면서 괴로워하니 뒤늦게 정승들이 들어와 내시들이 부축했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사관이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올렸으나 끝내 고명하지 못했다. 결국 신하들이 중전(인순왕후)에게 후계자 전교를 요구하자 “을축년(2년 전)에 하서(下書)한 일이 있는데, 그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균(鈞)을 후사로 삼은 일을 경들도 알고 있다”고 말하니, 신하들은 양사의 장관(예조와 사관)들이 알아야 한다며 중전에게 재전교를 부탁했다. 그러나 인순왕후는 “밤이 깊어 미안하니 서간으로 전한다” 해서 신하들이 물러나와 경회지(慶會池) 다리에 둘러앉아 좌의정 이명 등에게 중전의 전교를 논의하다 사관들이 들으려 하자 못 듣게 하니 불안의 기색이 많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의관이 왕의 수족이 식어간다 전하자 승지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등에게 주상을 봉영할 것을 큰 소리로 울부짖으니, 인순왕후가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재작년(을축년) 서한한 사람으로 하라”고 명했다. 죽어가는 명종 앞에서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삼남 하성군을 사왕(차기 왕)으로 지명한 것이다. 곧바로 명종이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했다.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1 웅장하면서 견고한 병풍석과 난간석의 능침 석물. 2 강릉의 신로와 어로는 자연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다.

    하성군 양자로 입양, 그가 곧 선조

    하성군은 세자교육을 받지 못해 신하들이 인순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다 행했다. 인순왕후는 중종의 양아들이 된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에게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일(日)자를 쫓아 연()자로 개명을 시켰다. 즉, 선조가 명종의 아들로 입적한 것이다. 이날 사직동에 있는 덕흥군의 사저에 가서 잡인의 접근을 막고 16세의 하성군을 맞으려 했는데 사군의 친모(정씨)가 사망해 빈소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사양했다. 그러나 내명(內命)의 중요성을 들어 경복궁 근정전 동뜰을 거쳐 입궁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하성군이 양자로 입양해 왕위를 이은 것이다.

    일주일 뒤 하성군이 근정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곧 선조다. 백관이 사배삼고두(四拜三叩頭)하고 산호(山呼·임금 취임을 축하해 만세를 세 번 부름)했다. 이후 이황 등이 명종의 행장을 수찬한 내용은 남아 있으나, 임란 때 각종 의궤와 함께 실록이 불타 국장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강릉지’에 일부 내용이 전한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송 본관의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로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왕비로 책봉됐으며, 1551년 명종과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세자가 13세 때 요절하고, 1567년 명종이 먼저 죽자 대비가 돼 16세의 선조를 수렴청정했다. 인순왕후는 선조 8년(1575) 1월 2일에 성의전(聖懿殿)에서 세상을 떴으며 명종의 능에 나란히 쌍릉으로 모셔졌다.

    상주인 선조에게 큰어머니이자 대비인 인순왕후는 각별했다. 전혀 가능성이 없던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했고, 문정왕후와 달리 1년만 수렴청정하고 왕권을 넘겨주었다. 그래서 선조는 인순왕후의 상례에 많은 공을 들였고, 장례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빈전랑청 등 많은 사람이 파직을 당했다. 능원의 자리도 명종의 강릉을 수산(水山)이니, 건산(乾山)이니 논의하다 금산(金山)이라 하고 지리설을 주장하며 지금의 강릉에 정했다.

    선조의 감독 아래 어렵게 조영된 강릉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고 온화하다. 그래서인가. 많은 조선 왕릉의 석물이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코, 갑옷 등이 총상을 입고 훼손됐으나 강릉만은 온전히 보전됐다.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쌍릉이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돼 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긴 만석이 있다. 혼유석은 왕릉과 왕비릉에 각각 설치했다. 450여 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 혼유석 상판을 물갈이한 흔적이 자꾸 사라져 신경이 쓰인다.

    강릉의 정자각은 최근 보수한 태릉의 정자각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고, 문무석인상의 인상과 형태는 전체적으로 태릉과 유사하다. 임진왜란 직전의 것들로 임란 이전의 능제시설 연구에 가치가 있는 능원이다.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3 임꺽정의 난 등 어려움을 겪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침은 웅장하게 조영돼 있다. 4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강릉 어정은 빠른 복원이 요구된다.

    문인 공간에 세워진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을 본뜬 16세기 복고풍 장명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대(火臺)가 하대석(下臺石)보다 좁아지고 몸체 부분이 길어지는 이러한 형식의 장명등은 할아버지인 성종의 선릉(宣陵)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릉의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보아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마치 머리가 양어깨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처럼 조각돼 있다. 석물의 재질이 전단강도가 약한 화강암이어서 목 부분이 가늘면 잘 부러지는 것을 고려해 이렇게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복장은 복두(頭)를 쓰고 관복(官服)을 걸친 문관의 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에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태릉과 마찬가지로 강릉의 문석인도 좌우에 따라 손의 위치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릉을 조각한 작가들이 강릉 조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산릉도감의궤’ 등에 참여한 인력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릉을 비롯해 임란 이전 능원의 의궤는 대부분 소실돼 확인이 어렵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무석인은 왼쪽의 경우 투구와 안면 크기가 엇비슷한 반면, 오른쪽의 무인석은 투구가 작고 턱과 양쪽 볼이 튀어나와 묘한 인상을 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왼쪽 무석인의 경우 팔꿈치에는 구름 문양을, 등과 무릎 부분에는 비늘 문양을 새긴 반면, 오른쪽 무인석은 띠가 생략된 가슴의 전면에 걸쳐 파도 문양을 조각했으며, 양어깨에는 귀면(鬼面)을 새겼다. 화강암 조각의 정교함이 우리 선조의 조각기술에 감탄하게 한다.

    정자각 왼쪽 앞에 가정자각 터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강릉의 진입 공간에 있는 금천교의 장대석은 아래로 배흘림해 구조적으로 튼튼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수라청 터 오른쪽 계류에는 원형의 어정이 있다. 조선 왕릉의 어정 중 몇 개 남지 않은 것이라 복원이 아쉽다. 정자각 왼쪽 앞에는 인순왕후 승하 때 사용했으리라 추정되는 가정자각 터가 있다. 조선 왕릉 중 가장 오래된 가정자각 터로 사료된다. 임금이나 왕비 중 어느 한 분이 먼저 승하해 3년이 지나면 길례(吉禮)로 정자각을 만들어 제례를 모시는데, 흉례(凶禮)로 함께 모실 수 없어 만드는 것이 가정자각이다. 명종이 승하한 지 3년이 지나 길례로 모시고 있으므로, 부득이 인순왕후는 흉례로 가정자각에 모셨다가 3년 후 길례로 본정자각에서 함께 모시고 가정자각은 철거했다. 이런 가정자각 터는 목릉의 인목대비 능침 앞에서도 볼 수 있다.

    태릉에서 강릉을 잇는 계곡과 능선 산책로 변에 자생하는 천연의 굴참나무와 진달래 숲은 수도권에서 보기 드문 생태경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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