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1

2010.06.14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성종과 정현왕후 선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6-14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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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① 하늘에서 본 선·정릉과 강남 지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엄청난 개발 압력 속에서도 능역을 보존해온 한국 국민의 정신이 세계 유산감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② 2010년의 선·정릉 주변. 점선은 정조 때인 1788년 발행한 ‘춘관통고’의 기록으로 추정해본 선릉의 능역이다.

    선릉(宣陵)은 조선의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14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동원이강형으로 서쪽 능침에 성종이, 동쪽 능침에 정현왕후가 잠들어 있다. 선릉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산131에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8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서울 시민에게는 매우 익숙한 곳이다.

    성종은 추존왕 덕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아무이며 1457년 7월 30일에 태어났다.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좌의정 한확의 딸이다. 정현왕후는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생모다. 1479년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의 능은 1495년 연산군이 조영했고, 정현왕후의 능은 1530년에 중종이 조영했다.

    세조는 첫째 아들인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이은 뒤에도 자산군(성종)을 왕실에서 키웠다. 어느 날 갑자기 뇌우가 쳐 바로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놀라 넋을 잃었는데, 자산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한다.

    1469년 11월 28일 숙부인 예종마저 일찍 훙(薨)하자 왕실의 큰 어른으로 군림하던 정희왕후(세조의 비)는 성종을 주상의 자리에 앉혔다. 이날 성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곧이어 교서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승하하면 사군(嗣君·차기 왕)이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상복을 처음 입음)을 한 뒤 즉위하나, 성종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일 즉위했다. 왕권 도전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서둘러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25년 1개월 재위 경국대전 편찬



    일설에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와 왕실 실권자인 정희왕후의 정치적 야합이었다고 본다. 성종은 11세에 한 살 위인 한명회의 넷째 딸(공혜왕후)과 결혼했는데, 왕위에 오를 때는 13세였다. 왕이 너무 어려서 섭정이 필요하자 정희왕후는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넘기려 했으나 한명회 등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7년 뒤인 1476년 1월 성종이 20세가 되자 정희왕후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왕에게 넘겼다. 이때도 좌의정 한명회가 반대했는데, 이에 대해 대사헌과 여러 대신이 매일 탄핵 상소를 올려 결국 3개월 뒤 한명회는 해임됐다. 3대에 걸쳐 권세를 휘둘렀던 한명회가 실권한 것이다.

    성종은 25년 1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세조 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키고 조선 전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무렵 성종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림(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써온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로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가리킴)을 대거 등용해 주로 언론기관에 배치하고 기존 훈구세력의 정책과 횡포를 비판하게 했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위독해 종친과 신하들이 문안하려 하나 “번거롭게 문안하지 말라”고 물렸다. 그리고 여자 의원과 종기를 다스리는 의원이 진찰하고는 배꼽 아래 종기가 생겨 이를 다스리는 약을 써야 한다고 했으나 오시(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에 성종은 대조전에서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성종에 대해 “총명 영단하시고 관인 공겸하셨으며, 천성이 효우(孝友)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무술과 서화에 정묘(精妙)했다. 대신을 존경하고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 벼슬)을 예우하고, 명기(名器)를 중히 여기고 아꼈으며 형벌을 명확하고 신중하게 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문무를 고루 등용하고 백성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셨다”고 평가한다.

    이윽고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이조와 예조에서 빈전도감(왕과 왕비의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시던 전각의 일을 보는 곳)을, 좌찬성과 호조에서 국장도감(국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을, 그리고 공조와 종친에서 산릉도감(왕과 왕비의 능을 만들 때 임시로 두던 기관)을 맡았다. 정부, 육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5품 이상이 시호를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으로 하고 묘호를 성종(成宗), 능호를 선릉(宣陵)이라 했다.

    3일 뒤 세자 연산이 왕위에 올라 이듬해 4월 6일 선릉에 장사 지냈다. 이때 연산은 성종의 묘호를 중국 황제와 같이 인(仁)자와 성(成)자로 논하고 그해 성종의 영정을 그리게 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영정이자 오늘날 제사상에 쓰는 사진 영정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성종의 산릉간심사(山陵看審事)는 윤필상, 노사신 등이 산릉 사방을 살피고 복명해, 여러 후보지 중 광평대군(廣平大君·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소학, 사서삼경, 문학, 산수에 능통하고 서예와 격구 등에 능했으나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의 봉사손으로 20세에 요절했다. 성종의 숙부뻘이다)의 묏자리로 정한다.

    여러 가지 풍수 논의 속에 옛 무덤의 이장을 걱정하나 당대 최고 원로였던 임원준이 “경성 근처에 건원릉, 현릉이라 할지라도 광평대군의 묘보다 못하다”며 대왕대비가 “광평의 묘는 그 자손이 병들고 요사했으며, 종친의 무덤이 주변에 많아(당시에는 선릉 지역에 태종과 세종의 후손의 무덤이 많았다) 예장(禮葬·예식을 갖추어 국가에서 장사 지내는 것)할 것이 많고 민가도 헐어야 해 민폐가 많으니 다른 곳으로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윤필상 등이 “광평의 묘는 건해좌(乾亥坐)인데 수파(水破)가 장생(長生)하므로 흉하고, 선릉은 좌향을 임좌(壬坐)해 수파가 문곡(文曲·구불구불한 것)하니 길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결국 산릉의 금한(禁限·영역) 안에 있는 모든 무덤을 옮기되 예장과 이사를 할 때 후하게 대접하고 천장을 하도록 했다. 광평대군의 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수km 떨어진 오늘날의 수서로 이장됐다.

    엄청난 개발 압력 속에서도 능역 보존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병풍석을 두른 성종의 능침과 곡장.

    정조 때인 1788년 편찬된 ‘춘관통고’에 따르면 선릉의 능역은 동으로 5리, 남으로 4리, 서로 3리, 북으로 3리로 둘레가 2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됐다. 사가의 무덤과 마을이 없어 개발이 용이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이 만들었다고 하겠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국내 학자들 간에는 선릉 지역 등 일부 훼손된 능역을 제외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 국제학자들과 학술대회를 하고 이곳 선릉에 들렀을 때 강남 개발의 내용과 주변의 지가 등을 설명했더니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학자들이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많고 지가가 높은 지역의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신이 세계 유산감”이라고 평하면서 조선시대의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해 연속유산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격려에 힘을 얻어 국내 학자들과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사상 최대인 약 1885만㎡(570여만 평) 15개 지구의 조선 왕릉 모두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성종의 대여(大輿·국상에 사용되는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저자도(楮子島) 아래 배 4척을 연결했는데, 건너는 순간 강물이 줄었다가 건너자마자 다시 창일(漲溢)해 사람들이 탄복을 했다고 한다.

    산릉도감의 인력은 다른 때에 비해 3000명이 늘어났다. 난간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시를 무시하고 만든 병풍석과 웅장한 석물조각들을 볼 때 동원된 인력이 1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이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당대 최고의 능역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어머니(폐비 윤씨)와 외할아버지(윤기무)가 조모(인수대비), 한명회 등에 의해 폐위돼 죽은 것을 알게 돼 결국 폭군으로 돌변한 그의 칼바람이 조정에 몰아쳤다.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① 웅장하고 거대한 무석인. 조선시대 무석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된다. ② 선릉 장명등의 옥개석과 상륜.

    연산군이 아버지 무덤 최고의 능역으로 조성

    성종이 떠난 지 36년(중종 25년)이 지난 1530년 8월 22일 대비(정현왕후)가 경복궁 동궁에서 승하했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성종의 둘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인 윤씨가 폐출되자 왕비로 책봉됐다. 이후 1497년 연산이 폐위되고 아들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대비가 됐으며 68세에 56년의 왕실생활을 마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며느리인 단경왕후(중종의 첫째 부인) 폐비사건과 장경왕후(중종의 계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장례는 정희왕후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정현왕후는 아버지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관아에서 출생해 이름을 신창의 창(昌) 자를 딴 창년(昌年)으로 했다 한다. 어머니 전(田)씨의 태몽에 ‘하늘의 채색 구름 속에서 천녀(天女)가 내려와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언문에 전해진다. 또 ‘성종 섬기기를 소심하게 날마다 새롭게 하고, 조금도 질투하지 않고 모든 비빈의 자녀를 친자식 같이 대하고, 시할머니 정희와 시어머니 소혜를 공경함이 더할 나위 없었다’고도 전해진다.

    시호는 원대한 생각을 잘 성취시킨 것이 정(貞)이고, 행실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현(顯)이라 하여 정현이 됐다. 1497년 10월 29일 선릉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모셨다.

    왕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이고, 왕비 능침은 12간의 난간석 봉분이다. 정현왕후의 능침을 조영할 때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등이 병풍석을 치는 것은 세조의 분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하지 않았다. 문무석인의 몸집이 크고 얼굴이 사실적이며 윤곽이 굵고 강직한 것이 특징인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 같다. 특히 왕비 능침 문무석인의 조각이 아름답다.

    성종은 12명의 부인 사이에서 16남 12녀를 두었다. 정비 공혜왕후 한씨는 세도가 한명회의 딸로 자식 없이 일찍 죽어 능호를 순릉(順陵)이라 하고 경기도 파주의 삼릉에 묻었다. 폐비 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연산군이 제10대 왕이며, 폐비 윤씨의 묘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다가 근래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구로 천장됐다. 큰아들 연산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에 있으며,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중종)은 같은 능역의 동남쪽 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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