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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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패션’ 선보인 럭셔리 업계의 진심

“럭셔리 업계도 비상”vs“어쨌든 부자는 있다”

  • 김민경 편집위원 holden@donga.com

    입력2008-11-03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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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 가능한 패션’ 선보인 럭셔리 업계의 진심

    이번 겨울을 겨냥해 랄프로렌이 선보인 복고적인 룩. 각진 어깨는 서구의 경제 불황기였던 1980년대를 연상케 한다. ‘유행을 타지 않아’ 한 벌 사도 될 것 같은 디자인.

    패션계도 좋은 시절은 가버린 것일까. 20세기 말에 시작된 번쩍번쩍하고 호화찬란한 패션의 시대는 끝난 듯하다는 게 패션과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난 몇 년간 럭셔리 패션시장은 아시아 등 신흥국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왔다. ‘리치스탄(richstan)’이라 불리는 전 세계의 젊고 새로운 억만장자들은 뉴욕 파리 같은 대도시에 수십억원짜리 콘도를 지은 뒤 톱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인테리어를 맡기는가 하면, 수천만원짜리 슈트와 예술작품에 가까운 드레스를 사들임으로써 패션의 관대한 후원자가 됐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가 근거하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오일 등 원자재 시장이 신기루처럼 무너지면서 럭셔리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2009년 봄여름 컬렉션 ‘머스트 해브’ 실종

    지난해 하반기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과 대기업들의 위기설이 흘러나올 때만 해도 중동 러시아 등 아시아 벼락부자들을 타깃으로 거침없이 마켓을 키우던 럭셔리 명품업체들은 지금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전 세계 자본 및 소비 시장 냉각에 크게 긴장하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럭셔리 그룹들의 주가는 지난 1년 사이 평균 주가하락률을 앞지르며 반 토막나 버렸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기발한 디자인으로 전 세계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넣던 디자이너들의 얼굴에서도 미소는 사라졌을까. ‘어두운’ 변화는 9월 말 이탈리아 밀라노 등 세계 4대 도시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이 패션쇼는 2009년 봄여름 패션 경향을 언론과 VIP 등에게 먼저 선보이고 전 세계 바이어들에게 미리 주문받는 패션 ‘마켓’의 기능도 겸한다.



    지난 몇 년간 패션쇼를 찾은 바이어들은 빠르게 변하고 세분화하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디자이너들에게 ‘좀더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기발한 것,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디자이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올 여름까지 패션과 미술의 ‘협업’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속 가능한 패션’ 선보인 럭셔리 업계의 진심

    백화점 세일 모습. ‘맥럭셔리’와 중저가 패션 브랜드의 매출이 급감한 반면, 최상위 ‘위버럭셔리’의 매출은 여전히 두 자릿수로 상승 중이다.

    그러나 이번 패션쇼에서는 디자이너들이 ‘새로움’보다는 ‘어떻게 하면 경제적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옷과 가방을 사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는 게 ‘월스트리트저널’을 포함한 대다수 언론의 평이다. 특히 구찌와 발렌시아가 등을 소유한 대표적인 럭셔리 그룹 PPR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이 밀라노 패션쇼에서 “부자들이야 늘 있게 마련이지만, 씀씀이를 결정하는 심리상태가 문제”라고 말한 데다 ‘정밀한 생산 및 유통 관리로 비용 절감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도 전해져 럭셔리 업계의 위기를 실감케 했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패션 디자이너들은 어떤 옷을 권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유행 따라 한철 입고 마는 하루살이 옷이 아니라 두고두고 입을 수 있을 듯한 ‘지속 가능한 투자형 패션’이다. 즉, 최첨단의 패셔니스타 같은 화려한 옷보다는 10년쯤 입어도 막 사 입은 듯하고, 막 사 입었어도 지난해 산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디자인은 진중해지고 소재는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한 번 세탁하면 너덜너덜해지는 얇고 밝은 옷보다 튼튼하고 어두운 색상의 옷이 더 선호될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새로운 ‘머스트 해브’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도 2009년 봄여름 컬렉션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매년 봄여름이면 당연히 등장하는 러플, 스트라이프와 도트 무늬가 겨우 ‘트렌드’로 눈에 띌 정도다. 늘 혁신적인 컬렉션을 선보여 패션기자들의 격찬을 받아온 프라다도 올해에는 유행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베이식한 디자인을 살짝 변형한 정도의 옷들을 선보였다. 귀족적이고 사치스럽게 보이는 컬렉션들로 인기를 끈 버버리프로섬은 카키색과 황토색에 클래식한 디자인을 매치했다. 줄곧 버버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던 버버리프로섬으로선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몇몇 럭셔리 업체 한국에서 철수

    ‘지속 가능한 패션’ 선보인 럭셔리 업계의 진심

    2009년 봄여름을 겨냥한 디자이너 컬렉션. 다른 해에 비하면 봄여름 옷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은 색과 고전적인 디자인이다(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버버리프로섬, 프라다,프라다,보테가베네타).

    이런 경향은 한국 디자이너들도 예외는 아니다. 10월 넷째 주에 열린 서울컬렉션에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내년 봄여름을 위해 무채색 컬러를 선택했고, 자연스럽고 복고적인 콘셉트의 의상을 선보였다.

    한국에서 도나카란, 랄프로렌, 끌로에 등 다수의 럭셔리 브랜드를 홍보하는 인트렌드 측은 “전에는 트렌디한 디자인을 선호하던 럭셔리 소비자들이 이번 겨울엔 유행을 타지 않는 블랙 컬러와 베이식한 아이템 중심으로 구매를 한다. 몇몇 브랜드는 패션쇼를 생략하는 등 마케팅비를 줄이고, 예정에 없던 세일을 통해 현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위버(최상위) 럭셔리 브랜드의 경우 소비 자체가 줄어든 것 같진 않다”고 말한다.

    최근 막스마라 등 몇몇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럭셔리 업계도 빙하기에 접어든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는 “사업을 접는 이유는 몇 년간 누적된 결과를 보고 한국 소비자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현재의 경제상황 때문이 아니다. 두 자릿수를 이어가는 백화점의 럭셔리 브랜드 매출 증가율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면서 “대중적이라는 ‘맥럭셔리’ 브랜드들이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10월 말 신세계 본점에서 매장을 철수하는 크리스찬디오르의 경우도 매장 위치가 문제가 돼 새로운 초대형 매장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백화점의 한 MD(상품기획자)는 “일반 남녀 기성복 브랜드의 매출이 지난해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데 비해, 명품 브랜드의 매출은 계속 증가해 손실을 상쇄하는 정도다. 앞으로 환율을 반영해 제품 값이 오르더라도 소비가 줄 것 같진 않다”고 전망했다. PPR 회장의 말을 되돌려보면 럭셔리 패션에서 달라진 건 단지 유행과 취향일 뿐이란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인터넷 패션사이트 ‘멘스타일닷컴’(men.style.com)은 클래식한 슈트의 유행을 점치는 ‘신보수주의 패션의 대두’를 알리면서 이렇게 조언한다.

    “직장에서 지나치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으면 감원 시 우선순위에 오를 수 있음에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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