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4

2016.09.07

와인 for you

가난한 자를 위한 최고급 스파클링

스페인산 카바 ‘로저 구라트’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6-09-02 1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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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 애호가들이 ‘가난한 자의 돔 페리뇽(Dom Perignon)’이라 부르는 스파클링 와인이 있다. 돔 페리뇽은 프랑스산 빈티지 샴페인이다. 누구나 마시고 싶어 하지만 워낙 비싸 쉽게 접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마실 수 있는 돔 페리뇽이라니, 그만큼 부담 없는 가격에 품질은 그에 못지않은 와인이라는 얘기일 터.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로저 구라트(Roger Gourlat)’라는 스페인산 카바(Cava)다. 카바는 스페인에서 샴페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발포성 와인이다. 로저 구라트가 이런 별명을 얻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로저 구라트의 생김새가 돔 페리뇽과 닮아서다. 특히 와인 레이블이 그렇다. 얼핏 보면 방패처럼 생겼는데 이것은 포도 이파리를 본뜬 모양으로 한때 유행하던 클래식한 레이블의 한 형태다. 두 번째는 수년 전 일본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때문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돔 페리뇽 로제와 로저 구라트 로제를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 적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돔 페리뇽인지 맞히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패널 다섯 명 중 세 명이 로저 구라트를 선택한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일본에서는 로저 구라트가 품절되는 현상이 벌어졌고, 지금도 로저 구라트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바라고 한다.

    로저 구라트는 어떻게 돔 페리뇽을 이길 만큼 좋은 품질을 얻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 철저한 품질관리다. 로저 구라트는 포도 매입에 돈을 많이 들인다. 그들은 농가로부터 평균 시세보다 최고 30%를 더 주고 포도를 사들인다. 단, 포도는 반드시 친환경적으로 재배한 것이어야 한다. 로저 구라트의 카바가 모두 빈티지인 것도 포도 품질이 좋아서다. 일반 스파클링 와인은 숙성 시작 연도가 서로 다른, 여러 해의 와인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레이블에 포도 수확 연도를 표기하기 어려운 반면, 빈티지 와인은 품질이 최상급인 당해 생산 포도만 써 수확 연도 표기가 가능하다.   



    로저 구라트도 매해 생산되는 최상급 포도만 쓰기 때문에 레이블에 수확 연도가 표기된 빈티지 카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 해에 생산된 포도를 쓰지만 숙성기간은 길다. 일반 카바는 15~18개월 이상, 최고급 그란 퀴베(Gran Cuve′e) 카바는 최소 48개월 숙성시킨다. 숙성은 지하 30m에 위치한 길이 1km의 거대한 카브(cave·저장고)에서 이뤄진다. 이 지하 카브는 로저 구라트가 1919년 당대 유명 건축가에게 특별히 의뢰해 제작한 것으로, 1년 내내 와인 숙성 최적 온도인 섭씨 14도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로저 구라트의 가격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5만~8만 원대다. 30만 원 정도 하는 돔 페리뇽과는 천지 차이다. 5만 원대인 일반 카바는 단맛이 없는 브뤼(brut)와 달콤함이 살짝 있는 드미섹(demi-sec) 등 두 가지가 있다. 둘 다 사과, 배 같은 과일향이 상큼하고 산미와 보디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로제(Rose)는 6만 원 정도로 달콤한 딸기와 체리향이 매력적인 우아한 스타일이다. 최고급인 그란 퀴베는 진하고 풍부한 과일향과 함께 꿀, 토스트, 견과류향이 뒤섞인 뛰어난 복합미를 자랑한다. 기포가 매우 부드럽고 와인을 목으로 넘긴 뒤에도 입안에 은은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가격은 8만 원대다.

    가난한 자의 돔 페리뇽이라고 하지만 로저 구라트는 돈이 없어 돔 페리뇽 대신 마시는 와인이 아니다.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와인을 알아보는 사람, 소박한 즐거움을 아는 이를 위한 와인이 로저 구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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