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5

2018.11.23

김작가의 음담악담

2011년 5월 30일 쌈지스페이스에서의 그 밤을 기억해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월요병 콘서트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8-11-26 1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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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지산밸리 락 페스티벌의 ‘언니네 이발관’ 공연 장면. [뉴시스]

    2010년 지산밸리 락 페스티벌의 ‘언니네 이발관’ 공연 장면. [뉴시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홍대 앞과 신촌의 중간쯤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산울림 소극장 근처’라고 부른다. 홍대 앞에서도 가장 먼저 상권이 죽어가고 있는 곳이다. 대로변 1층인데도 ‘임대’라고 쓰인 종이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다섯 갈래 길의 작은 로터리 중 하나는 와우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초입에 5층짜리 건물이 있다. 한때 쌈지스페이스로 불리던 이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여기서 펼쳐진 많은 공연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있던 마지막 이벤트를 추억한다. 

    2011년 5월 29일 밤 11시쯤. 마포구 창전동 5-129호 2층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지난 10년간 쌈지스페이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건물, 그 2층을 지켜왔던 라이브 클럽 ‘쌤’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석원.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이자 리더인 그는 그동안 이 공간에서 많은 공연을 했다. 2002년 3집 발매 후 이듬해부터 ‘월요병 콘서트’라는 이름의 브랜드 공연을 시작했다. 매주 월·화요일에 열린 이 공연은 몇 년간 지속됐고, 언니네 이발관의 성장과 함께하는 시그니처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에게 클럽 쌤은 특별한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클럽 쌤의 추억

    2004년 4인조 시절의 ‘언니네 이발관’. 왼쪽 아래부터 이능룡, 이석원, 정무진, 전대정. [동아DB]

    2004년 4인조 시절의 ‘언니네 이발관’. 왼쪽 아래부터 이능룡, 이석원, 정무진, 전대정. [동아DB]

    쌈지스페이스는 한국 기업으로는 거의 최초로 대중문화, 특히 인디문화를 후원한 쌈지에서 운영하던 공간이다. 건물 한 층에 카페와 레지던스, 갤러리, 공연장이 있었다. 1998년 개관했지만 2000년을 전후해 라이브 클럽 ‘바람’이 생겼다. 제대로 된 음향과 조명을 갖춘 최초의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이었다. 

    초기의 라이브 클럽들이 음악 술집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공연까지 하게 된 반면, 쌈지스페이스는 처음부터 공연장 목적으로 개관했다. 밴드들은 자기가 연주하는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는 모니터 환경에 감탄했다. 쌈지스페이스가 오픈한 후 차츰 사운드홀릭, DGBD 등이 생기면서 라이브 클럽은 ‘아지트’에서 ‘공연장’으로 변모했다. 밴드뿐 아니라 클럽도 세대교체가 됐다. 



    정식 이름은 ‘쌈지스페이스 바람’이었지만 홍대 앞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클럽 쌤’이라고 불렀다. 더 줄여 ‘쌤’이라고도 했다. 모던 록의 성지였던 스팽글의 조성숙이 쌤을 처음부터 맡았다. 스팽글을 아지트로 삼았던 많은 모던 록 밴드가 그대로 무대를 이곳으로 옮겼다. 

    물론 모던 록만 그곳 무대에 오른 건 아니었다. 노브레인이 주축이 된 펑크 레이블 ‘문화사기단’은 2000, 2001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그다음 날 아침까지 밤샘 공연을 했다. 둘 중 한 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겉보기엔 흉포한 펑크족들은 공연 사이 쉬는 시간마다 고요한 거리에서 눈을 맞았다. 2002 한일월드컵도 홍대 앞 사람들은 쌤에서 큰 화면과 공연용 스피커로 즐겼다. 공연장이지만 아지트 성격도 그 나름 있었던 것이다. 술만 팔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공간이 언제나 무심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고, 우리는 착각한다. 상상마당이 생기기 전까지 홍대 앞에서 가장 좋은 공연장이던 쌤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10년대와 함께였다.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쌈지스페이스도 경매에 넘겨졌다. 

    2011년 5월 26일부터 나흘간, 클럽 쌤의 마지막 공연이 열렸다. 이곳을 사랑한 밴드, 관객이 연일 무대와 객석을 채웠다. 그러나 언니네 이발관은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떼공연’으로는 자신들의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월요병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지만, 클럽 측과 밴드 측 모두 서로 조심스러웠기에 마음에만 담아둬야 했다.

    전격전으로 치른 라스트 콘서트

    2009년 3인조 시절의 ‘언니네 이발관’.왼쪽부터 이석원, 이능룡, 전대정. [뉴시스]

    2009년 3인조 시절의 ‘언니네 이발관’.왼쪽부터 이석원, 이능룡, 전대정. [뉴시스]

    그래서였을까. 이석원은 홀로 무대에 올랐다. 관객이 모두 빠져나간 객석을 스태프들이 청소하고 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그 광경을 나는 지켜보고 있었다. 기묘했다. 이석원은 다른 이들과 차단된, 일종의 결계 안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와도 다른 눈빛과 분위기였다. 

    술자리가 시작됐다. 숨어서 우는 이들이 있었고, 맥주를 마구 들이켜는 이들이 있었다.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다. 늘 관객이자 밴드들의 친구로 이 공연장을 찾았지만, 이렇게 끝내는 건 뭔가 석연찮은 기분이었다. 나는 클럽 쌤의 고위층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월요병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한 번 하는 게 어떻겠느냐. 이발관이 괜찮겠느냐. 굉장히 하고 싶어 한다. 내일이 마침 월요일이니 가능하면 하자. 술기운이 아니었으면 마음에만 담아뒀을 말이지만 일단 지르고 봤다. 

    이야기가 구체화됐다. 집에 가려는 이석원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오게 했다. 이석원은 함께 있던 이능룡에게 의사를 타진했고, 그 역시 하고 싶어 했다. 다른 멤버와 세션, 스태프들 모두 월요일 약속이 있었지만 흔쾌히 일정을 취소하고 함께하기로 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 진행 상황을 공지했다. 

    그리고 월요일. 저녁 8시 반에 시작되는 공연이었지만 4시부터 클럽 쌤 앞에는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선착순 무료입장이었다. 줄은 길어졌다. 쌈지스페이스가 있는 골목을 한 바퀴 빙 돌아 대로변까지 이어졌다. 얼추 헤아려도 800명 가까운 인원이 길바닥에 앉아 선착순의 행운을 기다렸다. 뒤늦게 왔다 줄을 보고 질려 돌아간 이가 부지기수였다. 클럽 쌤의 입장 가능 관객 수는 최대 350명. 그러나 이날은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그렇게 450명이 순식간에 클럽 쌤을 가득 채웠다. 

    언니네 이발관이 등장했다. 20여 곡의 노래를 두 시간 동안 연주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말썽을 부리던 장비들이 기적처럼 제 컨디션을 찾았고, 사람에 묻히기 십상인 사운드는 어느 때보다 최상의 질로 공간을 울렸다. 이석원은 말을 아끼고 노래에 집중했다. 이능룡은 소름 끼치는 기타 연주를 보여줬다. 관객은 떼창하고 환호했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이들도 부랴부랴 설치된, 공연장 밖 스크린을 통해 함께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 공연이 끝난 직후 기타 앰프 한 대가 영원히 사망했다. 

    언니네 이발관 또한 사실상 해체한 상황이었다. 이 공연을 기점으로 그들은 다시 뭉쳤고, 지난해 마지막 앨범을 낼 때까지 생명을 연장했다. 데면데면하던 남녀가 이후 며칠 동안 벌어진 술자리에서 커플이 돼 결혼하기도 했다. 홍대 앞 역사의 한 축을 오랜 세월 담당해온 클럽 쌤의 마지막에 걸맞은, 드라마틱하고 아름답고 멋지고 판타스틱한 순간이었다. 이 예정 없는 이벤트를 끝으로 기약 없는 활동 중단에 들어간 언니네 이발관에게도, 그 공간과 그 밴드를 사랑해온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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