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8

2014.03.10

한과 신명 시대의 ‘씻김굿’ 보러가자

박찬경 감독의 ‘만신’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4-03-10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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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과 신명 시대의 ‘씻김굿’ 보러가자
    “니 아바지는 오래 못 살겄다. 너그 오마이는 또 에미나이 낳는구나.”

    일제강점기 황해도 연백의 한 마을. 아들을 고대하던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난 김금화는 ‘요다음에는 아들이 넘석한다(넘본다)’는 뜻의 ‘넘세’로 불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넘세(김새론 분)는 또래가 모인 자리에서 천진한 얼굴로 서늘한 예언을 읊어대기 일쑤였고, 눈을 감으면 무시무시한 ‘대감들’이 보인다며 고통스러워했다.

    넘세는 일제의 군위안부 동원을 피하려고 13세에 낯모르는 남자와 혼인하지만, 시집의 모진 구박과 학대를 견디다 못 해 3년 만에 친정으로 도망쳐왔다. 까닭 없이 앓는 신병은 계속됐고, 결국 1948년 17세 넘세는 자신에게 깃드는 갖은 신을 다 받아들였다. 넘세가 강신무이자 만신인 김금화로 새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죽은 자는 억울하고 산 자는 가위눌려야 했던 우리 현대사 굽이마다 김금화는 생과 사, 신과 인간, 남과 북을 넘나들며 굿판을 벌였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과 그들이 남긴 한에 가위눌린 산 자의 고통은 고스란히 무당 것이 됐고, 그것으로 만신은 세상 ‘씻김’을 이루었다. 신내림을 받기 전엔 전근대기 여인의 수난을 온몸으로 겪었고, 6·25전쟁 때는 남에선 ‘빨갱이’, 북에 가면 ‘반동’으로 고초를 겪었다. 유신시대 새마을운동 때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내몰렸으며 기세 높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사탄’으로 손가락질받았으나,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던 5공 정부는 때 아닌 국가적 잔치판(‘국풍’)을 벌여 무속을 ‘전통’으로 떠받들었고 TV에서도 무당을 수시로 불러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역사의 굴곡과 함께하며 곡절 많은 인생을 산 무당은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지하철참사, 천안함 침몰사건 등 유난히 죽음이 많은 우리 시대 나라의 만신이 돼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산 자의 복을 비는 씻김굿을 해왔다.



    영화 ‘만신’(감독 박찬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기ㆍ예능 보유자인 김금화(83) 씨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만신은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 이 영화는 김씨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에 바탕을 두고 삶의 주요 부분을 드라마로 재현했으며, 김씨와 지인들의 인터뷰, 실제 굿ㆍ공연 장면과 과거 기록 영상을 끼워 넣었다. 드라마로 재현한 그의 일생은 나이에 따라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가 연기했다.

    드라마와 판타지, 다큐멘터리가 섞인 ‘만신’은 형식도 흥미롭지만, 김씨 일생에서 뽑아낸 신비로운 에피소드와 무속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장면들이 더욱 흥미진진하다.

    ‘만신’의 마지막은 넘세를 연기하는 김새론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제까지의 주요 출연자와 스태프를 모두 만나면서 펼치는 ‘걸립’ 장면이다. 걸립은 무당이 될 ‘신애기’가 내림굿을 받기 전 거쳐야 할 가장 중요한 절차로, 마을을 돌며 못 쓰는 쇠를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모은 쇠는 방울, 명도, 화경 등 각종 무구를 만드는 데 쓴다. 죽은 쇠를 녹여 산 쇠를 만드는 걸립은 치유와 평화의 지향을 드러내고, 어린 김새론이 류현경과 문소리를 만나는 장면은 배우란 이 시대 무당이며, 영화는 우리 시대 씻김굿이라는 주제를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굿 보러 간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고 1930년대를 증언한 천경자 화백의 말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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