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6

2010.10.04

중년남자 불안과 욕망 벗기기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0-10-04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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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남자 불안과 욕망 벗기기
    홍상수의 영화들은 웃긴다. 그런데 새 영화 ‘옥희의 영화’를 보며 자주 웃을 수는 없었다. 홍상수의 이 영화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그 중년은 인생의 트랙을 절반쯤 돌아본 자만의 세련된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그 남자는 9부 능선쯤에서 등산을 마치자고 말하며 기약 없는 장난 같은 약속에 마음을 묻는다. 여자와 하룻밤 자려고 쩔쩔매던 남자가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세 남녀에 대한 옴니버스 영화다. 배경은 어느 대학 영화과이고 주인공은 영화과 교수, 강사, 학생 이렇게 셋이다. 구성은 좀 복잡하다. 비교적 짧은 80분짜리 이 영화는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로 이뤄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은 눈치 없는 남자 ‘진구’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망신을 당하는 내용이고, ‘키스 왕’은 학생 진구가 옥희와 마침내 사귀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폭설 후’에서는 시간강사 송 선생이 학생 진구, 옥희와 특별한 인생 대담을 나눈다. 마지막 단편인 ‘옥희의 영화’는 옥희가 만든 작품으로, 그녀가 만난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 이야기를 대조하고 있다.

    언뜻 보면 누가 누구냐는 선긋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시간강사 송이 송 교수의 과거라 해도, 학생 진구가 시간강사 진구와 겹친다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옥희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한 남자의 일대기’다. 껍질을 벗기면 계속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어쩌면 중년 남자의 늘어난 몸피 안에는 단단한 근육질의 청년이 있을지도 모른다. 송 교수와 진구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의 다른 시간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홍상수는 늘 ‘젊은 남자’ 이야기를 그려왔다. 젊은 남자에게 가장 심각한 난제는 바로 여자다. 그래서 ‘오! 수정’에서도, ‘생활의 발견’에서도, ‘하하하’나 ‘밤과 낮’에서도 홍상수의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당신과 자고 싶다는 말을 현학적 형이상학으로 수식하려는 찌질이들은 나름 지식인들로 구성된 관객을 부끄럽게도 웃게도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 ‘옥희의 영화’는 젊은 남자가 아니라 ‘나이 든 남자’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든 남자’는 전임교수가 되기 위해 눈치를 살피고 여자 앞에서 육체적 욕망을 참아내기도 한다. 이런 차이점은 표제작이기도 한 마지막 단편 ‘옥희의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의 가장 큰 차이는 키스와 등정에서 나타난다. 나이 든 남자는 혹시나 유부남인 자신을 누가 알아볼까 품에 안긴 옥희를 서둘러 밀어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젊은 연인은 툭 트인 정상에서 마음껏 진한 키스를 나눈다. 나이 든 남자는 정상 근처의 잘생긴 나무 앞에서 등산을 끝내고 이곳에 매년 1월 1일 1시에 오자고 약속한다. 젊은 남자는 기왕이면 정상까지 가자며 옥희의 손을 이끈다.

    나이 든 남자의 눈에는 옥희만 신경 쓰는 젊은 남자의 무방비한 시간이 부럽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나이 든 남자의 안정된 미래가 부러울 따름이다. 시간은 잔혹해서 안정과 젊음을 모두 주지 않는다. 남자는 주체 못할 성욕에 절절매던 불안과 결별했지만, 결별하자마자 그 순간을 그리워한다. 젊음의 엔트로피는 불안과 욕망을 함께 준다. 안타깝지만 욕망은 불안과 함께 사라진다.

    홀로 약속을 지키고 먼발치에서 옥희를 바라보는 나이 든 남자의 뒷모습은 울적한 사색을 선사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현실적으로는 젊은 남자에 가깝고 심리적으론 나이 든 남자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음의 엔트로피에서 벗어나 중년을 보여준, 깊어진 홍상수의 시선이 선사한 행복한 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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