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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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엄마 버전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의 ‘마더’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9-06-03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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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엄마 버전 ‘살인의 추억’

    살인 누명을 쓰고 구속된 아들(원빈)을 면회하는 엄마(김혜자). 엄마는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탐정으로 변신한다.

    감독은 대사의 앞뒤 연기 지문에 그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라고 썼다. 그 지문을 읽은 배우는 기가 찼다. 대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란 무엇일까’ 싶어서. 그러나 김혜자의 얼굴은 그 표정을 담아냈다.

    갈대밭에서 이병우가 작곡한 탱고에 맞춰 국적 불명의 춤을 출 때, 모든 일이 끝난 뒤 버스 안에서 추는 춤사위에 슬픔과 치열한 광기가 혼재했다. 마더(mother)와 머더(murder) 그 사이에서 김혜자는 처연히 어깨를 들썩이며 기억과 망각의 춤사위를 날았다.

    영화 ‘마더’에서 보여준 봉준호 감독의 서스펜스 장악력은 이제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작두날과 아들의 교통사고를 목격하는 어머니의 시선이 교차 편집되는 첫 장면부터 영화는 시종일관 작두 끝의 날선 핏방울 하나로도, 희번덕거리며 눈을 뒤집는 여배우의 눈매 하나에서도 섬뜩한 서스펜스를 건져올린다. 또 곳곳에 맥거핀(줄거리를 풀어가는 장치로 실제 살인사건과는 상관없는 미끼로서의 단서들)의 덫을 만들어놓고, 관객이 함정에 빠지도록 교묘히 이야기를 풀어간다.

    시골 마을에서는 여고생이 옥상에 빨래 내걸리듯 거꾸로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죽어 있고,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골프장에서는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옥신각신 추격전이 벌어진다. 경찰서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형사가 피의자 입에 사과를 물리고 그 사과를 단번에 반쪽 낸다. 영화 속 시각적 이미지의 돌출은 관객의 뇌리에 연타를 날리면서, 선연한 이미지 자체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와 폭압성을 전한다.

    영화 속 어머니는 아들만을 바라보는 미친 엄마, 맹목적인 모성에 목을 매는 엄마다. 장성한 아들(비록 아들이 천치 바보일지도)과 아직도 잠자리를 같이 하는 근친상간적인 엄마다. 영화 ‘마더’는 어찌 보면 역(逆)오이디푸스에 빠진 어머니 버전으로 재구성된 ‘사이코’의 속편이고, ‘살인의 추억’의 바보 버전이며 ‘플란다스의 개’의 아주머니 버전이기도 하다. 아들의 오줌줄기를 바라보며, 그의 입에 보약을 떠먹이는 그런 어머니.



    이 어머니는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을 감옥에서 구하려고 탐정 노릇을 자임한다. 물론 외국에서 활동하는 미스 마플 같은 여성 탐정들이 ‘미혼, 양성애자’라는 도식에 묶여 있다면, 이 새로운 시골 어머니 탐정은 아들을 기르는 데 있어서도 문제의 마지막 실마리와 치유 과정까지 스스로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도식이 영화를 여성주의 자체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다. 영화 속 어머니는 ‘맹목적 모성’이라는 도식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감독에서 시작해 배우로 끝나고, 봉준호로 시작해서 김혜자로 끝난다. 이 어머니를 ‘세븐 데이즈’에 나오는 변호사 출신의 도회적 싱글맘 김윤진과 비교해보라. 둘 다 장르적 관성 아래서 하나의 ‘타입’으로 여성성을 소구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관객은 이 영화를 즐길 것이다. 봉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 이후 모처럼 사건의 전모를 남김없이 설명해주고, 박카스 안에 든 농약의 기억처럼 세상사를 적절한 당의정과 쓴 진실 모두로 포장한다.

    그것은 먼지 낀 쌀독에 진실을 묻어두고, 서걱거리는 작두에서 양심을 찾으며, 돌발적인 교통사고에서 모성을 찾는 봉준호식 블랙유머의 결정판이다. 그리고 국민 엄마를 통해 뽑아낸, 한 의뭉스런 감독의 히스테리컬하게 리바이벌된 ‘살인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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