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2009.03.24

눈물겹게 봉합한 인도의 두 얼굴

대니 보일 감독의 ‘슬럼독 밀리어네어’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9-03-20 16: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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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겹게 봉합한 인도의 두 얼굴

    주인공 자말(왼쪽)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맞히고 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해 먼저 알아둘 점은 발리우드(인도)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어쩌다 감독도 모른 채 봤다. 딱 5분이 지난 순간, 연출이 심상치 않았다. 인도 영화의 새로운 기수가 나타났구나 하면서 가슴이 뻐근거렸다. 그런데 웬걸. 영화가 끝나고 자막을 보니, 대니 보일의 이름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무릎을 쳤다. 왜 영화 속에서 에든버러에 대한 퀴즈(대니 보일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가 계속됐는지 의문이 풀렸다.

    영화는 하나의 퀴즈처럼 시작한다. 제목 ‘슬럼독’은 빈민을 가리키고,‘밀리어네어’는 백만장자를 뜻한다. 백만장자 퀴즈쇼에서 2000만 루피(약 6억원)가 걸린 문제까지 맞힌 빈민가 초등 중퇴 학력의 소년은 어떻게 그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을까? 퀴즈쇼의 화려함과 이어지는 소년에 대한 경찰의 고문 장면의 교차 편집은 이 영화의 주제를 첫 10분 안에 요약해낸다. 즉,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제목의 기묘한 조합처럼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세상의 충돌과 희망의 손짓을 눈물겹게 봉합한다.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TV쇼야말로 인도가 현재 달려가는 자본주의 사회, 종교가 아닌 퀴즈(지식)로 무장한 계급의 탄생을 알리는 차가운 미디어의 요람이다. 그에 반해 시종일관 노란색으로 채색된 소년의 과거와 뭄바이 빈민가의 모습이 대표하는 ‘슬럼독’은 종교와 가난의 족쇄에 묶인 전근대적인 인도의 환부, 누렇게 곪아 진물이 흐르지만 희망을 머금은 전근대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변모하는 인도의 가면과 내면, 현재와 과거, 신흥 부자들과 여전히 착취당하는 빈민계층이 뒤섞인 인도의 두 얼굴이 버티고 서 있다.

    주인공 자말은 바로 이 세계의 중간에 서서 희망과 사랑을 꿈꾼다. 가족, 형제애, 사랑 같은 궁극적인 주제를 담은 스토리와 전작 ‘트레인스포팅’을 보는 듯한 대니 보일의 재기발랄한 연출은 한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유머, 슬픔, 두려움, 감동의 무지개를 120분 안에 완벽하게 이끌어낸다.



    사실 소년에게 퀴즈쇼 문제들의 답은 ‘꿈에선들 잊힐 리야’ 수준으로 각인된 것들이다. 어린 시절 똥물을 뒤집어쓰고라도 사인을 받고 싶었던 인도의 대배우 아미타브 밧찬 사합의 이름, 어머니가 죽던 날 보았던 라마신의 오른손에 들려진 활과 화살을 어찌 잊으랴. 자말의 대답은 직렬로 나타나는 시각적 이미지들로 계속해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퀴즈쇼야말로 자말에게 기억의 행로를 더듬어 내려가는 추억과 외상의 퍼레이드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한 소년의 기억 속에 잠겨 있는 인도는 종교적 갈등과 거대한 쓰레기산에서 넝마를 줍는 아이들, 구걸을 더 잘하기 위해 산 사람의 눈을 망가뜨리는 인권유린, 빈부 격차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 채 허허롭다. 모순 천지인 인도의 다양성은 누구도 격절시키지 못하는 갠지스 강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대니 보일 감독은 온갖 초월과 신비에 대한 갈망과 오리엔탈리즘을 투사시킨 서구인의 판타지에도 통렬한 어퍼컷을 날린다. 자말과 그의 형의 눈으로 보자면 타지마할은 인도 국민이 서구의 자본을 흡혈하는 앵벌이 동산이며, 외국인들이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뽑아낼 수 있는 돈벌이 동산에 불과하다.

    오스카를 비롯한 골든글로브, BAFTA 등 유수한 영화제의 수상 경력이 말해주듯, 대니 보일은 ‘트레인스포팅’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허우적거렸지만 최고 기량으로 ‘왕의 귀환’을 알린다. ‘슬럼독’이 아닌 영화제의 ‘밀리어네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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