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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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적 로맨스와 어색한 서부극의 결합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오스트레일리아’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8-12-17 2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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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적 로맨스와 어색한 서부극의 결합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화술에 서부극과 전쟁영화의 뼈대까지 얹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예전에 단체관람 했던 고전 영화들이 마구 떠오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독일의 가을’처럼 영화 제목에 나라 이름이 등장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영화의 스케일이 커 보이는 착시효과가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 거두절미하고 나라 이름 자체가 제목인 영화가 나타났다. ‘오스트레일리아’. 예상대로 크다. 거대하다. 1500마리의 야생마가 절벽에서 포효하고, 벨기에 전체 면적보다 큰 목장이 나오는 이 영화는 슈퍼 킹 사이즈에 심지어 양까지 많다.

    음식으로 치면 아웃백 스테이크에서 파는 가장 두꺼운 스테이크 요리 되시겠고, 책으로 치면 읽는 대신 베고 자야 할 만큼의 책, 음악으로 치면 베를린 필 못지않은 대단한 교향악단인 셈이다. 자그마치 2시간46분의 러닝타임에 제작비만 120억 달러. 영화 두세 개는 만들 돈으로 굽이굽이 다양한 장르와 스토리의 고전적 서사극이 호주의 광활한 대지 위에 걸려진다.

    이 영화가 서사극이라는 증거는 이미 영화의 초반부, 영화를 이끌어가는 1인칭 화자인 원주민 소년 눌라의 내레이션에서 감지된다. 백인도 흑인도 아닌 이 소년은 주술사인 할아버지에게서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년이 말하는 ‘이야기하는 법’을 감독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 ‘오스트레일리아’를 보다 보면 예전에 단체관람 했던 고전 영화들이 마구 떠오른다.

    일단 영국 귀부인이던 사라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며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왔지만 막상 남편은 살해당했고, 이 와중에 자신을 마중 나왔던 소몰이꾼 드로우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뻔한 공식.

    또한 남성 라운지를 이용하려다 ‘여자와 흑인은 안 된다’는 주인장의 으름장에 일시 후퇴하지만, 당당히 소 1500마리를 승선시킨 뒤 라운지 뭇 남성들의 존경과 환호를 받는 장면에서 생각나는 영화는?



    이후 기질은 억세지만 자유분방하고 정의감 넘치는 사라가 눌라를 입양하기 위해 자선 파티에 갔다가 남편이 물려준 파러웨이 다운즈 목장의 경쟁자인 킹 카니에게 춤 경매를 당하는 장면의 원전 영화는?

    할리우드 장르들로 꽃단장한 호주 프로파간다 영화

    그렇다. 예상대로 영화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화술에 서부극과 전쟁영화의 뼈대까지 얹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광활한 스펙터클과 서사적 로맨스는 그렇다 치고, 여기에 서부극을 얹은 감독 바즈 루어만의 저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시 이 영화의 제목 ‘오스트레일리아’를 화두로 삼아야 풀리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장르의 속성상 서부극은 배경이 되는 대지를 신성불가침한 처녀지로 재단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바즈 루어만 역시 죄수들의 추방지라는 전설을 지닌 이 나라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으려 한다. 모험과 낭만이 숨쉬는 개척의 땅 호주(아, 어쩌면 이다지도 호주관광청의 광고문구와 똑같을까). 그런데 이 공식대로라면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카우보이는 결국 여자를 떠나 국가, 곧 처녀지로 상징되는 황야를 떠돌아다녀야 하는데, 어떤 서부극에서 카우보이가 아이 낳고 가족 이루고 정착해서 벤츠나 몰고 다니는가. 그래서 드로우버는 자신의 소매를 부여잡는 사라에게 절충주의적 수정안을 내놓는다. 우기에는 집에서, 건기엔 황야에서.

    그러나 이런 반쪽 해피엔딩에 성이 찰 바즈 루어만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호주는 더 완벽한 희망과 화합의 땅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호주 자본을 잔뜩 끌어다,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이라는 호주가 낳은 걸출한 스타들만을 써서 호주에 대한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애초 장르적 역사와는 인연이 없는 이 땅에 바즈 루어만은 온갖 사그라진 미국식 장르의 옷을 입히고,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비극을 딛고 통합과 화해의 새로운 픽션을 써내려간다. 즉, 호주의 각기 다른 계급을 상징하는 주인공들, 귀족의 혈통으로 이 땅을 빼앗고 지배했던 백인들(사라)과 그곳에서 신음하고 삶을 유린당했던 원주민들(눌라와 그의 가족), 그리고 개척과 모험정신으로 충만한 평민과 서민들(드로우버)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사 가족을 이루며 ‘컴 백 홈’을 외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즈 루어만은 ‘진주만’류의 전쟁영화 장르를 빌려와서 일본이란 외부의 적을 하나 더 만들어야 했다.

    여성과 흑인은 들어올 수 없다던 술집에 마침내 원주민을 받아들여 ‘형제여’를 외치며 잔을 함께 들고, 모든 역경을 이겨낸 이 유사 가족의 마지막 대사가 ‘집으로 가요’라는 것은 이 영화의 주제에 필수적 장치 아니겠는가. 여기에 루어만 감독은 ‘오즈의 마법사’를 빌려 노래와 꿈을 찾아 무지개 건너 ‘오즈의 나라’에 갈 것을 권유한다(핀란드인들이 자국 국민을 ‘수오미’라 부르는 것처럼, ‘오즈’는 바로 호주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레일리아’는 할리우드 장르들로 꽃단장한 2시간46분짜리 호주 프로파간다 영화다. 할리우드에서 동떨어져 미국과는 참으로 다른 상상력을 잉태한, 대륙적 기질의 영화를 만들었던 호주. 정말 진국의 호주 영화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토끼 울타리’ ‘시암 선셋’ ‘프리실라’ 등의 영화를 권한다. 백인 주류문화에 길들이지 않은 색다른 상상력과 역사적 반성이 뒤엉켜 있는 호주 영화의 매력이 무엇인지, 오히려 이들 영화가 박제되지 않은 진짜배기 호주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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