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8

2008.03.25

검은 황금 좇는 냉혈한 통해 부패한 개척정신 꼬집기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8-03-19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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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황금 좇는 냉혈한 통해 부패한 개척정신 꼬집기
    사나이는 마지막 석유 시추를 할 수 있는 땅이 있다고 유혹하는 청년에게 이렇게 외친다. “너한테도 나한테도 밀크셰이크가 있어. 그런데 난 내 빨대를 가지고 너의 밀크셰이크에 꽂아 다 먹어버리지. 난 매일 너의 물을 마셔. 매일 그 땅의 피를 마시는 거야.” 사내는 악마 같은 비웃음을 얼굴 가득 흘린다.

    이미 사내는 주변의 땅을 다 사버린 뒤 거대한 송유관을 통해 남은 기름을 죄다 뽑아낸 터. 미국의 광대한 황무지에서 나오는 석유라 불리는 검은 수액이 누군가의 무지와 가난과 노동력에 대한 ‘흡혈’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순간,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는 지난날 할리우드의 로맨틱 대작 ‘자이언트’와는 정반대로 미국 신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금광을 찾아 헤매던 다니엘 플레인뷰는 어느 날 갱도에서 우연히 석유를 발견한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아이를 남기고 죽자, 석유 시추업자로 업종을 변경한 다니엘은 동료의 아이를 아들로 삼고 석유를 찾아 헤맨다. 그는 쉴 새 없이 사람들에게 아이를 내보이며 자신은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끊임없이 땅을 사들이고 시추를 한다.

    어느 날 리틀 보스턴이라는 캘리포니아에 석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니엘은 아들 H.W.와 함께 가서 확인한 뒤 악착같이 지역민의 땅을 인수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강적이 있으니, 바로 제삼계시 교회를 이끄는 사이비 목사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지역민 엘리.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이복동생이라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나고, 아들 H.W.는 시추작업 현장에서 귀가 멀어버린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 발군



    아마도 ‘데어 윌 비 블러드’(‘피를 부르리라’라는 뜻)의 진짜 제목은 ‘데어 윌 비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니었을까? 그만큼 이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발군이다. 그의 캐릭터, 그의 욕망과 의지, 광기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등 뒤에 악마를 숨긴 주인공은 불굴의 투지로 그 어떤 난관과 제약도 뛰어넘는 희대의 개척자이자 마초로 군림한다. 다니엘이 연기하는 다니엘 연기의 최고 정점이다.

    그는 자신에게 은덕을 베푼 자에게는 적당한 기부와 빵 부스러기 같은 이득도 나눠주지만, 그와 경쟁하거나 넘보려는 자에게는 추호의 자비나 동정도 거둬버린다. 때론 송유관 묻을 땅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의 죄를 고하고,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을 정도로 실용적이다. 여자에게도 종교에도 매몰되지 않는 주인공은 집요하게 검은 황금만을 좇는다. 분노를 의지의 용광로에 땔감으로 써대는, 악마와 기꺼이 거래할 수 있는 냉혈한 사업가 다니엘 플레인뷰에게는 석유업계의 파우스트라는 수식이 더 적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차갑고 검은 피가 흐르는 이 남자의 혈관에도 또 다른 피,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이 숨어 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끊임없이 등장하는 갱도의 이미지는 한때는 쓸모없다 생각하고 버렸지만 결국에는 귀머거리 아들을 품에 안거나, 가짜 동생이라는 것이 밝혀진 떠돌이를 가차없이 살해하는 다니엘의 심연에 대한 음화나 다름없다.

    검은 황금 좇는 냉혈한 통해 부패한 개척정신 꼬집기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미국의 탐욕을 다룬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그는 마국의 개척정신을 어두운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은근히 영화 내내 이 기고만장, 의지불굴한 인물에 대해 심리적 거리를 갖기를 원한다. 영화의 첫 장면, 깊은 갱도를 파내다 다리를 다치고 석유를 발견하는 10분 동안 화면을 채우는 것은 대사가 아니라, 음울하고 괴기스럽고 때론 신경질적이게 들리는 조니 그린우드(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의 스코어다. 음악 덕분에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에 몰두하기보다 자꾸 화면에 거리를 두게 된다. 즉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에 대한 영화이자 사운드 몽타주의 영화인 것이다. 장면은 아직 바뀌지 않았는데 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세상은 소음과 광기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한 구절처럼.

    자, 그렇다면 1927년 출판됐던 업턴 싱클레어의 원작 ‘오일!’의 첫 150쪽가량만 차용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대표적인 포르노 산업의 메카 산 페르난도 계곡에서 나고 자란 폴 토머스 앤더슨의 평생 관심은 인간의 욕망, 그것도 미국 캘리포니아의 욕망이었다. ‘펀치 드렁크 러브’를 제외하고 그는 일관되게 탐욕스런 섹스 산업(부기 나이트)을, 모든 인간성을 앗아가는 도박산업(리노의 도박사)을, 그리고 세상을 건조한 퀴즈쇼로 만든 방송산업(매그놀리아)을 다뤄왔다. 이제 ‘데어 윌 비 블러드’가 묘사한 과거는 미국 석유산업에 대한 중의법처럼 보인다. 석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거대한 촉수를 드리우고, 석유가 있는 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디에서든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미국의 풍요 뒤엔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복수와 적의로 똘똘 뭉친 목사 엘리와 다니엘은 중세의 성 같은 다니엘 집에서 마주친다. 장성한 아들은 동업자에서 경쟁자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났고, 술에 곯아떨어진 다니엘 앞에 또 다른 사탄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에덴의 동쪽에서 석유탑을 마주하고 원수가 된 카인과 아벨의 형상이다. 다니엘과 엘리의 탐욕과 사악함은 다니엘 저택에 나란히 놓인 볼링장 레인처럼 닮아 있다.

    다니엘은 엘리를 볼링 핀으로 처참히 죽인 뒤 ‘다 끝났다’고 중얼거린다. 전작 ‘매그놀리아’에서 쏟아지는 개구리 비를 차용해 소돔과 고모라를 보여줬던 그는, 다시 한 번 구약 이미지를 차용해 한 인간의 지옥도에서 끝을 맺는다.

    수직의 갱도에서 수평의 볼링장 레인으로, 흙과 땀이 뒤범벅된 손에서 탐욕과 오만이 가득한 매끈한 흰 손으로.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이며, 한 영혼의 죽음이며, 이제 끝없는 원죄의 질곡을 둘러쓰고 살아야 하는 ‘카인의 후예’의 마지막 중얼거림이기도 하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미국의 개척정신이 어떻게 미국식 자본주의에 의해 부패되고 악마적으로 변모했는지에 대한, 피와 살로 쓴 역사 일지다. 젖과 꿀이 넘치는 미국의 풍요에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다는 회한의 반성문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세계, 그 참담한 소돔과 고모라 땅에 다시 한 번 검은 피 우박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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