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2

2008.02.05

신체 바꾸기 달콤한 제안 스릴 넘치는 베팅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8-01-30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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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바꾸기 달콤한 제안 스릴 넘치는 베팅
    영생불사의 명약을 꿈꾸던 진시황의 후예들에게 마지막 남은 꿈이 있다면, 남의 몸을 빌려서라도 지구상에 발붙이고 싶은 신체 강탈의 의지일 터. 공상과학(SF) 영화 ‘우주의 침입자’ ‘바디 에이리언’ 등 일명 ‘바디 스내처(신체 강탈)’물에는 언제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인간 근원의 공포가 서려 있다.

    그런데 윤인호 감독의 신작 ‘더 게임’에서는 신체 강탈의 주체가 외계인이 아닌, 돈 많고 여자 많고 욕심 많지만 젊음이라는 거꾸로 가는 시계가 없는 재벌이다(뜬금없는 생각이지만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외계인은 재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니타 다쓰오의 만화 ‘체인지’가 국내에서 ‘더 게임’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니타 다쓰오는 70권짜리 대작 만화 ‘보스의 두 얼굴’로 잘 알려진 작가다.

    만화 ‘체인지’는 가난한 화가가 노(老)재벌을 상대로 자신의 몸을 담보해 게임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윤 감독은 이 같은 모티프를 그대로 빌려오면서 스릴러 요소를 가미해 원작의 결말과는 달리 흥미진진한 반전으로 장르의 방점을 찍는다.

    영화의 시작은 평온하다. 공원에서 행인들의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하는 민희도(신하균 분)는 가난하지만 여자친구 은아(이은성 분)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림을 그려준 남자에게서 이상한 전화가 걸려와 “당신이 남자라서 내기에서 이겼다”는 말을 듣는다.



    그 후 찾아온 중년여성 혜린(이혜영 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저택을 방문한 희도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금융회사 회장 강노식(변희봉 분)과 휴대전화 번호를 무작위로 눌러 전화 받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내기하자는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여자친구가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것을 막아낼 길 없는 희도는 그만 돈 30억원에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한 위험한 게임에 빠져든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흥미로운 플롯의 얼개로 보는 이의 숨을 빨아들인다. 뇌와 척수를 뒤바꾸는 이식수술로 몸에 수술 자국이 있는 회장과 화가, 두 사람은 마치 죄의 탯줄과 피의 바코드를 수혈받은 샴쌍둥이의 모습이다. 영화를 잠시 되돌려보면, 첫 장면에서 희도가 대학로 공원에서 초상화를 그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노식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얼굴을 그릴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희도 집에 있는 그리스 석고상도 그의 미래를 교묘히 예언하고 있다.

    일본 만화 ‘체인지’가 원작 … 변희봉 신하균 등 열연

    신체 바꾸기 달콤한 제안 스릴 넘치는 베팅
    젊은 화가 이태경의 회화는 영화 적재적소에서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남긴다. 한 인간 안에 들어간 부정교합의 몸과 영혼은 늘 타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떨칠 길 없는 화가의 자의식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스크린을 메워나간다.

    여기에 노회한 재벌의 탐욕을 본떠야 하는 노인(신하균)과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후회와 절망에 몸을 떠는 청년의 영혼을 거푸집 한 청년(변희봉)의 연기력이 얹히면서 영화의 재미는 배가된다.

    청년의 육체를 앗은 회장이 다시 태어나 윤택한 피부를 만끽한 뒤 “내가 젊어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뭔지 아나?” 하며 얼음을 씹어 먹을 때, 신하균의 표정은 ‘두 얼굴의 배우’라는 또 다른 만화 시리즈라도 만들고 싶을 만큼 분기탱천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윤 감독은 뒤바뀐 정체성의 스토리 라인에 하필이면 신체 강탈의 스릴러를 입힌 것일까. ‘페기 수 결혼하다’ ‘빅’ 그리고 한국 영화 ‘체인지’ 등 지금까지 주인공의 정체성이 뒤바뀌는 영화는 코미디물이 많았다. 또 엄마와 딸의 육체와 정신이 바뀌는 일본 영화 ‘비밀’이나 이를 리메이크한 뱅상 페레의 ‘더 시크릿’ 등은 멜로 쪽에 가깝다.

    하지만 윤 감독의 영화는 둘 다 아니다. 사람들은 ‘페이스 오프’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악마와 내기를 걸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던 고전 스릴러 (이렇게 말해도 실례가 안 된다면) ‘파우스트’를 닮았다.

    윤 감독이 스릴러를 선택해서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스릴러의 얼개에 여러 장르적 장치가 이물스럽게 끼어들면서 중반부를 넘어서면 밀도가 희석되는 게 아쉽다는 것이다. 일단 재벌회장의 몸에 꽃다운 청년의 뇌와 척수가 이식되자,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진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배우 변희봉이 삼촌 역의 새파란 손현주에게 “삼촌, 삼촌” 하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반대로 모든 것을 가진 회장이 된 신하균이 화가의 아름다운 애인까지 넘보자, 자신의 원수와 데이트하는 애인을 보며 변희봉은 길가 한 모퉁이에서 눈물을 흘린다. 뜬금없는 멜로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서둘러 영화 봉합 느낌 … 관객 설득 실패

    그런데도 윤 감독은 장르의 방만함을 몇 건의 살인과 또 다른 게임의 주술에 맡기는 모험을 강행한다. 스토리에 묻혀 오락이자 ‘진실’ ‘정체성’ 등을 의미하는 도박, 휴대전화 같은 시각적 이미지가 두루뭉술해져 간다. 이는 기자간담회에서 이혜영 씨가 자신의 연기가 많이 잘려나갔다고 말했던 점을 미뤄보면, 윤 감독이 후반부 상당 부분을 들어내면서 서둘러 영화를 봉합했다는 심증이 간다. 이런 추론이 나올 만큼 영화 마지막은 스릴러로 관객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세븐 데이즈’ ‘우리 동네’ 등 근래 들어 새로운 장르에 목말라하는 대한민국 감독들의 도전이 반가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영화 장르의 지형도를 등산하는 길은 가파르기만 하다. 영화 ‘더 게임’의 가장 큰 게임은 바로 윤 감독이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만 기대할 만한 카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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