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6

2007.05.22

눈부시게 화창한 날 잔뜩 찌푸린 여인의 삶

  • 입력2007-05-16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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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시게 화창한 날 잔뜩 찌푸린 여인의 삶
    결론적으로 말해 이창동 감독의 신작 ‘밀양’은 날씨에 관한 영화다. 정말이지 모두가 ‘밀양’을 보고 용서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 눈에는 해와 구름, 비가 보였다. 영화를 자세히 보시라. 영화에는 비 오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온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그놈’을 만나 스스로 용서하리라 다짐한 순간, (오히려 그놈이 ‘하느님에게 용서받았다’고 늠름하고 환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교도소를 나오던 신애는 쓰러지고 만다. 영화는 그 한 장면을 빼곤 시종일관 눈부시게 화창한 여름날이 계속된다. 정말이지 ‘빌어먹게 좋은 날씨’의 연속이다.

    남편 잃고 찾아온 밀양, 그런데 아들마저 잃다니

    밀양(密陽). 햇볕이 빽빽한 곳. 동시에 숨겨진 양지. 데뷔 때부터 죽 이 감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만 매달렸다. 그게 이번에는 날씨인가 보다.

    황량한 모래언덕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에선 ‘오아시스’는 숨겨진 비경에 속한다. 알싸한 맛을 내는 ‘박하사탕’은 입 안에 들어가면 모두 녹아버린다. ‘초록물고기’는 처음부터 초록색 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감독의 영화 제목은 늘 다르면서도 똑같다. 마치 오즈 야스지로가 ‘늦은 봄’ ‘이른 봄’ ‘늦가을’ 식으로 자기 영화에 계절 이름을 붙이며 동일한 가족이야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창동은 시작부터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것에 위로받고 기대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쉬운 게 아니라는 것,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 논리대로 한다면 숨겨진 양지, ‘밀양’에 관한 이야기는 흐린 하늘과 비바람만 계속되는 어떤 영화였어도 주제를 표현하는 데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마지막 한 장면에만 햇볕이 사르르 비쳐도 좋았다. 그런데 영화는 이와 정반대로 진행된다. 신애와 그녀를 사모하는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 분)이 처음 만났을 때, 신애는 다짜고짜 “좋다”고 한다. 종찬이 “뭐가 좋냐”고 묻자 “햇볕이 좋다”고 말한다. 그때도 화면에는 바람 한 점 없이 햇살이 낭창하다.



    그러나 경남 밀양의 날씨와 달리, 진짜 비바람이 불고 흐린 하늘이 계속되는 건 바로 신애의 삶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저기압의 삶. 이 여자는 지금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아들과 함께 어떻게든 이 땅에 마음 붙이고 살아보려 한다. 사실 여자의 남편은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여자는 그 모든 걸 철저히 부정한다. 아예 남편이 자신을 몹시 사랑했던 듯, 남편의 고향에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유괴범의 손에 세상을 떠난다. 이제 삶을 도륙당한 이 여자에게 남은 것은 하느님밖에 없다. 너무도 당연히.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교회 집회에 나가 여자는 가슴이 뜯어져라 울며 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린다. 열심히 신의 축복을 찬양한다.

    그런데 한때 사랑했던 신마저 여자를 배반하는 게 아닌가. 용서해주리라 마음먹었던 유괴범을 만나자 막상 그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며 결자해지는 애초 불가능하다. 여자는 다시 한 번 쓰러진다. 이 대목에서 여자의 이름을 곰곰이 살펴보자. 신애. 믿음과 사랑. 여자의 삶과 달리 밀양의 날씨는 화창하고, 이름과 달리 여자의 삶은 믿음과 사랑 모두에 배반당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 잔뜩 찌푸린 여인의 삶
    유일하게 기댄 하느님마저 그녀를 배반?

    그러니 “햇볕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던 수줍은 신애의 편에 설 것인가,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있냐?”고 외치는 신애 편에 설 것인가. 당신이라면 그래도 살겠는가? 무엇에 기댄 채?

    불가해한 삶의 그물망 앞에 던져놓은 이창동의 질문은 영화의 시작과 끝 모두를 꼭 막아선다. 영화를 본 누구도 이 실존적 질문에서 비켜나갈 수 없게끔, 그가 던지는 질문의 화살은 강렬하다. 사실 이 영화의 시작은 하늘이고, 끝은 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첫 장면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볕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고, 그 시선은 아이가 죽은 뒤 다시 하늘을 무심히 쳐다보는 신애의 시선에 겹쳐진다. 그러나 그 깊은 분열증적 고통의 세월을 보낸 뒤, 하느님에게 복수하겠다는 온갖 에피소드를 거친 신애와 그 옆에 선 종찬을 지켜보는 시선은 신애의 것도 아이의 것도 아닌 카메라의 것이다. 이 지구상에 내려앉은 한 조각 햇볕을 바라보는, 어쩌면 ‘신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영화는 감독의 말대로 하늘에서 시작해 땅에서 끝난다. 신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믿음의 문제로 시작해 사랑의 문제로 끝난다. 부흥회식 구원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리얼리즘이란 강박에 포획되지도 않은 채, 지난 4년 동안 이 감독은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더 깊숙이 자신의 역사 내부로 내려간 듯 보인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역사적 조망에 대한 관심이 충만했던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과 달리, ‘오아시스’는 육체의 장애에 관한 것이고 ‘밀양’은 마음의 장애에 관한 영화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감독의 내밀한 고백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꾸 이 불모의 땅에서 감독은 구원을, 빛을 찾아나선다.

    이창동식 리얼리즘에 포위된 사랑의 기운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근원적 갈망을 건드리며 비밀스러운 판타지가 된다. ‘오아시스’에서 공주가 비추던 거울의 빛 조각이나 ‘밀양’의 비밀스런 한 조각 빛은 마음이 참할 때에만 언뜻 나타났다 사라진다.

    의심할 나위 없는 ‘좋은 영화’ … 그러나 2% 부족

    ‘밀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다. 참 좋은 영화다. 그러나 나는 이 문학적이고 사람 속을 꿰뚫는 듯한 작가 감독이 영화적인 면에서도 조금만 더 비밀스러워지기를 바란다. ‘밀양’은 여전히 카메라의 자의식보다는 문학적 자의식과 연기 앙상블이 더 두드러진 영화로 보인다. 물론 전도연의 연기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정점에 올랐고, 송강호의 연기도 주인공의 감정을 탄탄히 받쳐준다.

    그런데 컷과 컷 사이의 긴장감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영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고 해야 할까. 늘 이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2% 부족한 영화적 허기를 느낀다. 좋은 것에서 위대한 것으로. ‘밀양’이 이제 욕심을 부려볼 지점은 ‘좋은 무언가’가 아니라 ‘위대한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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