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0

2006.08.29

여자가 되고픈 소년 씨름판으로 가다

‘천하장사 마돈나’

  • 입력2006-08-23 18: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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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되고픈 소년 씨름판으로 가다
    ‘천하장사 마돈나’때는 1980년대. 마돈나의 노래 ‘Like a virgin’을 누군가가 듣고 있다. 황홀한 오후, 완전히 음악에 빠져서 대청마루에서 헤드뱅잉을 하는 꼬마. 그런데 정면을 보니 꼬마는 얼굴에 립스틱을 잔뜩 칠한 남자아이다. ‘천하장사’라는 지극히 남성적인 이미지와 ‘마돈나’라는 여성적인 이미지를 이형접합시킨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마돈나를 꿈꾸는 한 남자 고등학생이 성전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간다는, 다소 뜬금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전환 수술비 마련 위해 씨름대회 우승 도전

    ‘천하장사 마돈나’는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학원물 장르에 트랜스젠더의 문제를 담은, ‘몽정기’ 같은 청소년의 ‘성’이 아닌 청소년의 ‘성차’ 문제를 들고 나온 영화다. 영화를 보노라면 ‘나의 장밋빛 인생’과 ‘빌리 엘리어트’, ‘으랏차차 스모부’를 합쳐놓은 것 같다. 영화는 그만큼 이질적이고 파격적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도 지울 길 없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발레리노를 꿈꾸는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오동구는 여자, 그것도 마돈나 같은 여성이 되기를 꿈꾼다. 사실 이 ‘동구-돈나’는 가녀린 소녀 같은 친구가 아니다. 한마디로 강호동이 고현정을 꿈꾸는 격이다. 동구는 노동을 해서라도, 장학금을 타서라도 여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마치 동구의 또래 친구가 풍물패에 힙합, 씨름선수까지 두루 거치며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다만 동구는 이러한 정체성의 탐색을 넘어, 그 꿈이 아주 확정적이고 자기도취적일 뿐이다. 중국집을 하는 친구 집에서 몰래 중국옷인 치파오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칠한 동구는 거울을 보며 친구에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 약간… 장만옥 같애.”



    80년대를 거쳐온 동구의 이상적 여성 표상이 마돈나로 집약된다면, 동구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세상은 온통 남성적인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친구들은 툭하면 여성적인 동구를 놀리고 볼썽사나운 쪽지를 등에 붙인다. 특히 거대한 기중기로 상징되는 동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실패한 권투선수 출신이다. 세상이 무섭다는 걸 가르치려 드는, 전형적인 패배자의 편집증적 분노와 의심을 함께 가진 동구 부친은 그 감정을 가족에게 모두 쏟아붓는다.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가출을 하고, 동생은 그 아버지를 똑같이 닮아가고 있다.

    여자가 되고픈 소년 씨름판으로 가다
    초난강·이상아·백윤식 등의 연기 일품

    영화는 여장남자의 문제를 계급 안에서,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소화하면서도 많은 장치들로 대중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웃음의 당의정으로 감독의 문제의식을 감싸안으려는 시도 중엔 일본 선생에 대한 동구의 짝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성장담의 연대기적 서술보다는 동구의 주관적 시점과 느낌이 빈번하게 강조되면서, 다정한 꽃미남 일본어 선생에 대한 연정과 팬터지 역시 만화처럼 처리된다. 일단의 연애 장면을 그리는 클리셰(상투적 표현) 같은 연출이 과장되게 반복되고, 동구는 선생님이 준 누룽지맛 사탕 껍질을 다림질까지 해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 선생님이 예쁜 처녀와 결혼한다는 게 아닌가. 동구는 운동장을 나선 일본어 선생님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냐”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언사다.

    여기에 인천이라는 공간과 롯데월드라는 팬터지 공간이 곁들여진다. 이미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어른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닌 채, 상고를 졸업해 일찍 취업한 아가씨들의 공간이었던 인천이 다시 한번 서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모호한 주변부적 공간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맥아더동상을 두고 철거하느냐, 마느냐로 소란스런 거리는 바로 동구의 정체성을 두고 충돌하는 학교와 가정, 노동자 계층을 아우르는 주변부의 초췌함과 온갖 이국 문물이 침투한 타자성이 묘하게 공존하는 곳이다. 반면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 동구 어머니의 공간은 ‘롯데월드’로 상징되는 전형적인 가상공간이다.

    여자가 되고픈 소년 씨름판으로 가다
    처음부터 주부가 아닌 귀여운 스위스풍 하이디의 복장을 하고 나온 어머니는 동구가 꿈꾸는 마돈나만큼이나 인위적이고 현실감 없으면서 한편으론 가부장제의 피해를 등에 지고 동구를 이해해주는 분열증적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또 아주 만화적인 캐릭터가 추가된다. 바로 동구가 몸담고 있는 씨름선수단의 코치와 선수들. 명백히 ‘으랏차차 스모부’의 캐릭터들을 연상케 하는 이들은 수영장에 천막을 치고, 화장실에서 코치 일을 본다. 특히 간지럼 증세로 고생하는 씨름선수는 설사 증세로 고생하는 ‘으랏차차 스모부’의 아오키를 연상케 한다(이 영화의 씨름 장면은 감독들이 가장 열심히 촬영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선 편집조차도 정면 컷을 위주로 하면서 동선을 잘라내는 전형적인 만화적 편집과 스포츠 장르에서 보여주는 트레킹 등 역동적 장면들이 함께한다).

    폭압적인 아버지에 한판승 … 다양성 억압에 대한 반기?

    이렇게 ‘천하장사 마돈나’는 좋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과 우리 사회의 문제를 웃음과 함께 버무린 영화다. 초난강이 일본어 선생으로 나와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뽐내고, 11년 만에 스크린으로 외출한 이상아가 소녀 같은 어머니 이미지를 탄생시키고 있으며, 백윤식 씨의 타이밍을 뺏는 듯한 연기는 가히 일품이다. 영화에 뭔가 자극적이고 놀랄 만한 것은 없지만, 팬터지에 대한 홀림과 우리 사회에 대한 소박한 분노, 천진한 상상력은 이해영과 이해준 두 젊은 감독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또한 장르의 자장 안에서도 흥미로운 궤적을 그린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대한민국 장르 영화는 아버지의 부재와 그 부재를 형제애와 친구들의 관계로 메우는 일련의 터널을 건너왔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그렇다. 그런데 ‘천하장사 마돈나’에 이르러서는 팬터지의 무지개를 타고서라도 폭압적인 아버지와 대항하려는 우리 사회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전면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동구가 자신의 출전을 말리는 아버지를 한판 뒤집기로 내던질 때, 이들 초유의 공동 감독 역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과의 씨름에서 한판승을 거둔다. 비록 ‘동구-돈나’의 영웅담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마초 영웅들 속에서 외롭겠지만, 그 출발 자체가 작은 시작의 큰 결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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